부정선거로 취임 후 부패…미국의 지지 철회 움직임 속 와해됐던 탈레반은 세력 회복4월 5일 대통령 선거 실시 카르자이 '3선 제한' 출마 못해퇴임 후 '美 꼭두각시' 보복 우려… "백악관에 극한 분노" 태도 돌변이젠 크림반도 합병까지 지지
표변은 정치인의 숙명이라지만 반미주의자로 돌변한 하미드 카르자이(57) 아프가니스탄 대통령만큼 극적인 사례도 드물 것이다. 왕족 출신이란 점을 빼면 변변한 배경이 없던 그가 탈레반 정권이 붕괴한 2001년부터 권좌를 지켜온 것은 미국의 든든한 후원 덕이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아프간전쟁이 내게 남긴 것은 미국 정부에 대한 극한의 분노"라며 삿대질하고 있다. 미군 특수부대를 탈레반 근거지에서 추방하는가 하면 미국의 극력 반대에도 테러 용의자들을 대거 풀어줬다. "미군을 완전 철수할 수도 있다"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위협에도 양국 안보협정에 서명하길 거부하고 있다. 왕조를 무너뜨린 소련군 침공에 맞서 무장투쟁을 했던 그가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을 지지하는 데 이르면 표변의 철저함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카르자이는 왜 그토록 철저히 미국에 등을 돌린 것일까.
두려운 역사의 수레바퀴
카르자이를 이해하려면 다음달 5일 치러질 아프간 대선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10명의 후보가 각축을 벌이고 있는 이 선거에 카르자이는 대통령 3선 연임 제한 규정 때문에 출마할 수 없다. 주요 종족만 7개이고 탈레반을 위시한 무장조직이 1,800개에 이르는 불안정한 아프간 정치구조에서 퇴임 후 영향력을 유지하려면 특단의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다. 특히 미군이 연말에 아프간 군경을 양성할 소규모 병력만 남기고 예정대로 철수할 경우 탈레반이 권력 탈환에 나설 공산이 크다. 카르자이는 그 복수극의 최우선 표적일 것이다.
현지에서는 카르자이의 돌변을 '미국의 꼭두각시'라는 이미지를 벗으려는 필사적 노력으로 보는 분위기다. 카르자이 측근들과 가까운 사업가 사드 모흐세이는 뉴욕타임스에 "카르자이는 자신을 본협정의 화신으로 여기는 세간의 여론을 뒤집으려 하고 있다"고 전했다. 본협정은 미국이 2001년 아프간을 침공해 탈레반 정권을 몰아낸 직후 아프간 주요 정파가 독일 본에 모여 합의한 정국 로드맵으로, 카르자이는 그 첫걸음인 임시정부의 수반에 선출되며 단번에 거물정치인 반열에 올랐다. 이 과정에서 아프간전쟁 중 반탈레반 세력을 규합하는 카르자이의 수완을 눈여겨 본 미국의 지원이 작용한 것은 물론이다.
권력교체기마다 핏빛 보복이 반복된 아프간 근현대사는 카르자이를 더욱 필사적이게 한다. 국제칼럼니스트 파리드 자카리아는 "카르자이는 자신의 전임자였던 무함마드 나지불라가 맞은 참담한 최후를 떠올리고 있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소련의 아프간 침공을 계기로 실권을 장악하고 대통령(1987~92년 재임)에 올랐던 나지불라는 1996년 수도 카불에 입성한 탈레반 반군에 붙잡혀 '소련의 꼭두각시'라는 죄목으로 처형 당했다. 대통령궁 앞 신호등에 목이 매달리기에 앞서 그는 거세가 뒤따른 고문을 당했고 트럭에 매달려 카불 거리를 개처럼 끌려다녀야 했다. 탈레반으로부터 이미 "나지불라와 같은 꼴을 당할 것"이라는 경고를 받은 카르자이가 미국 모르게 탈레반과 평화협상을 진행하려 했다는 보도가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커져 가는 미국에 대한 불신
카르자이와 미국의 관계를 들여다보면 그의 반미 행보를 마냥 정치적 술수로 치부하긴 어렵다. 카르자이가 임시정부 수반을 시작으로 13년 동안 아프간을 통치하는 동안 미국의 권력은 조지 W 부시 대통령에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으로 넘어갔다. 9ㆍ11테러에 대한 보복 조치로 중동에서 치열한 대테러전쟁을 수행했던 부시 정부와 달리 오바마는 이라크에 이어 아프간 철군 일정을 마련하며 지구적 수준의 대테러전을 마무리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대테러전의 '수혜'를 입고 권력을 잡은 카르자이에게 오바마 정부의 대테러전 출구전략은 자신의 입지를 불안하게 만드는 조치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미국에 대한 카르자이의 불신은 2009년 재선 과정에서 증폭된 것으로 보인다. 카르자이가 부정선거 논란 속에 결선투표를 겨우 피하고 당선을 확정하는 동안 오바마, 조 바이든 부통령 등 미국 최고위급 인사들은 아프간 정부의 부패 문제를 공공연하게 거론했다. 힐러리 클린턴 당시 국무장관은 카르자이를 향해 "마약국가를 운영하고 있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국가 경제의 30%를 아편 생산에 의존하고 이복동생 등 측근들이 마약 경제에 연루돼 있는 상황을 겨냥한 것이다. 과도정부 수반 시절 통합 정치를 내세우며 지역 군벌ㆍ부족장의 양귀비 재배를 묵인해달라고 미국에 요구하고 관철했던 때와는 천양지차다.
미국의 지지 철회 움직임은 카르자이 정부의 무능과 부패가 자초한 측면이 크다. 종족 간 알력이 강한 아프간에서 55%의 높은 지지율로 대통령에 처음 당선됐던 그는 불과 5년 만에 암살 위협으로 외출을 꺼리는 통에 '카불 대통령'이라 조롱받으며 재선에 쩔쩔매는 처지가 됐다. 치적도 없진 않다. 취임 이래 연평균 9.2%의 성장률을 기록하면서 2002년 4억달러에 머물렀던 국내총생산(GDP) 규모가 2009년 13억4,000달러로 급성장했다. 탈레반 치하에서 교육을 받을 수 없었던 여성들이 이제 취학생의 3분의 1을 넘어섰고, 3,200만명 인구 중 1,200만명 이상이 휴대폰을 사용하고 있다. 경찰도 없던 국가에서 군대와 경찰이 창설돼 치안력을 키우고 있다.
그러나 취약한 내실을 감추긴 힘들다. 2009년 기준으로 미국 등 외국 원조금이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60%에 이른다. 그러나 심각한 관료 부패로 원조금이 법대로 집행되는 비율은 60% 수준에 불과하다. GDP의 30%는 아편 생산 및 수출에서 나오는데 세금을 거둘 수 없는 지하경제다. 국민의 42%가 한달 수입 14달러 미만의 빈곤 상태라 아편 생산은 더욱 기승을 부린다. 아프간 인구의 27%만이 위생적 식수를 구할 수 있고, 수세식 화장실·하수시설 등 위생시설을 제대로 갖춘 인구는 5%에 불과하다는 통계도 있다.
카르자이를 위한 변명
카르자이가 국내외에서 무시받는 존재로 전락하는 동안 아프간 남부에서 절치부심하던 탈레반은 카불을 위협하는 세력으로 거듭났다. 미국 등 다국적군과 북부동맹(반탈레반 부족 연합체)에 패해 종족(파슈툰) 근거지인 남부로 숨어든 탈레반은 농민들의 마약 생산을 보호하고 이슬람주의를 앞세워 사법권을 행사하며 세력을 회복했다. 불법 무장단체를 무장해체하고 정규군으로 편입하려던 새 정부의 작업이 지체된 것도 탈레반에 호재였다. 2006년쯤부터 무장활동을 재개한 탈레반은 지상전 대신 공중폭격으로 전술을 바꾼 다국적군에 맞서 아프간에서 전례없던 자살폭탄테러를 수행하는 등 공격 강도를 높이고 있다.
탈레반의 세력 회복과 카르자이의 위기는 사실 동전의 양면과 같다는 지적이 나온다. 모두 아프간에 서구식 근대국가가 이식될 만한 토양이 없다는 점을 방증한다는 것이다. 18세기 왕조 수립 이후 아프간 권력은 줄곧 파슈툰 두라니 부족이 잡아왔지만 중앙 권력의 통치범위가 카불 등 일부 대도시를 벗어나는 일은 거의 없었다. 험준한 산악지형 때문에 영토가 분절되면서 종족 및 부족 중심의 지역사회 위주로 통치가 이뤄졌기 때문이다. 최대 종족인 파슈툰의 경우 파슈툰왈리라는 자체적 규범으로 일상이 규율됐고 통치는 지르가(부족장회의)를 통해 집단적으로 이뤄졌다.
19세기 제국주의 영국이 침공해 종족 영역을 무시하고 국경선을 그으면서 아프간 부족 갈등엔 파키스탄, 이란,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필연적으로 개입됐다. 외세 개입으로 잠재된 아프간 부족의 갈등은 소련과 미국의 침공으로 전면적으로 표출되고 있다.
파슈툰 종족이지만 탈레반 주축인 길자이 부족과는 앙숙인 두라니 부족인 카르자이가 통치력을 미치는 영역은 아프간 전역의 30%에 불과하다. 다른 30%는 탈레반, 40%는 지방 군벌들이 장악하고 있다. 2004년 제정된 아프간 헌법에서 부족사회 유산인 지르가를 '아프간 국민의 최고기구'로 명시한 것도 중앙집권적 정부 발전을 방해한다. 카르자이가 아무리 깨끗하고 유능한 정부를 꾸렸더라도 그가 통치 실패를 피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훈성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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