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잘 지내세요? 저는 괜찮아요. 며칠 있으면 크리스마스에요. 가족들과 좋은 시간 보내세요!'
크리스마스 등 명절 때면 한미영(47) 경희대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에게 이 같은 문자메시지를 꼬박꼬박 보냈던 착한 30대 젊은이가 있었다. 한 교수는 심장질환으로 인해 언제 위독해질지 모르는 이 젊은이에게 언제든지 연락하라고 휴대폰 번호까지 알려줬다. 안타깝게도 이 젊은이는 2년 전 심장 부정맥으로 세상을 떠났다. 어릴 때 수술만 받았어도 남들처럼 살 수 있었던 생이 30대에 저문 것이다.
어른의 심장혈관질환은 대부분 자신의 잘못으로 생긴다. 하지만 아이의 심장이나 혈관은 많은 경우 어른 때문에 아프다. 어른의 무관심이 아이에게 성인병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우기도 한다. 한 교수는 그런 아이들에게서 오히려 삶을 배운다.
"아이 혈압도 확인하세요"
"저라면 부모를 탓하며 비뚤어졌을 것 같아요. 자신의 잘못도 아닌데 자기한테 언제든지 좋지 않은 상황이 닥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고,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어요. 성탄절이나 명절 때면 꼭 생각납니다."
2년 전 생을 마감한 그 젊은이는 심장병을 갖고 태어났다. 어린 시절 제때 수술을 받지 못해 폐에 연결된 혈관이 점점 딱딱해지는(폐동맥고혈압) 합병증을 얻었다. 합병증을 발견했을 땐 이미 수술이 어려울 정도로 나빠진 상태였고, 갑자기 부정맥이나 폐출혈이 생기면 생명이 위태로울 수 있었다. 우려하던 일이 결국 일어났던 것이다.
선천성 심장혈관질환이라고 하면 얼마 전만 해도 의사들조차 '저 아이가 몇 살까지 살 수 있을까' 싶던 경우가 태반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숨 쉬기도 힘들던 아이가 멀쩡히 회복되기도 한다. 의술과 약이 발달한 덕이다. 그래도 여전히 조기 발견에 대한 인식은 더 확대될 필요가 있다고 한 교수는 강조한다. 소아 심장혈관질환은 많은 경우 출생 직후 병원에서 발견되지만, 한동안 눈에 띄는 증상이 나타나지 않는 아이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심장이나 혈관에 문제가 있으면 가슴이 갑자기 두근거릴 수 있어요. 표현력이 부족한 아이들은 이럴 때 그냥 배가 아프다고 하죠. 토하거나 식은땀을 흘리며 축 처져 있을 때도 많아요. 체육 시간에 간혹 쓰러지거나, 또래보다 몸무게가 아주 적거나, 잘 안 노는 아이도 검사해볼 필요가 있어요. 특히 가족 중 고혈압 환자가 있는 아이는 더 신경 써야 합니다."
자녀의 말이나 증상만으로 부모가 아이의 심장혈관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긴 어렵다. 가령 배가 아프다고 하면 배탈일 거란 생각부터 들게 마련이다. 부모가 아이의 키나 몸무게뿐 아니라 혈압에도 평소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영ㆍ유아부터 청소년 때까지 심장과 혈관은 계속 자란다. 때문에 성별과 나이, 키 등에 따라 정상 혈압 수치가 달라진다. 한 교수는 "3세 이상 어린이는 정기검진 때마다 혈압을 측정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대한소아과학회 역시 초중고교 입학을 하기 전에 혈압을 꼭 확인해보길 권하고 있다.
어른들의 잘못 때문에
아이의 심장혈관 검사에서 영양상태가 과잉인 경우가 자주 발견된다. 심하면 고혈압이나 고지혈증, 지방간 같은 성인병 증상이 어린이에게 나타나기도 한다. 성인병과 심장혈관질환이 밀접한 관련이 있는 어른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성인병의 영향은 어른보다 어린이에게 훨씬 크다. 성장이 정상적으로 이뤄지지 못할 뿐 아니라 학교생활에도 문제될 수 있다. 혈압이 높은 아이는 체육 시간에 친구들처럼 심하게 운동하면 안 된다. 지방간이 있으면 간 기능이 떨어지기 때문에 공부할 때 쉽게 피곤해진다. 눈에 띄게 뚱뚱하면 심리적으로 위축되고, 천식, 수면무호흡증, 담석증 같은 다른 병이 생기기도 한다. 소아 비만은 성인 비만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소아 성인병의 절반 정도는 부모를 비롯한 가족이 원인입니다. 편하게 만들 수 있는 음식 위주로 먹이는 부모가 있는가 하면, 몸에 좋다는 음식만 무조건 골라 먹이기도 하죠. 또래를 따라잡아야 한다고 아이 몸무게를 빨리 늘리는 데만 집중하는 부모도 있어요. 이 모두 소아 성인병이나 심장혈관질환의 위험을 높입니다."
아이의 잘못된 식습관을 고쳐주겠다는 생각보다 영양제로 보충하려고 하는 부모도 요즘 많다. 하지만 한 교수는 "모유 수유를 오래 했거나 다른 문제로 인해 균형 잡힌 식사를 하지 못한 아이가 아니라면 영양제가 큰 효과를 내진 않는다"며 "비만이 되지 않도록 이유식 시기부터 올바른 식습관을 갖도록 교육시키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미래 환자 줄이는 게 최고 보람"
한 교수가 진료실에서 만나는 아이들은 생사 갈림길에 서 있거나, 마음은 어린데 몸은 어른처럼 아프다. 또래처럼 마음껏 놀지 못하고 실컷 먹지 못한다. 남들이 보면 안 됐다는 마음부터 들 터다. 그래도 치료만큼은 엄격해야 한다는 게 한 교수의 신념이다.
"일하는 엄마라 미안한 마음에 혹시라도 굶을까 봐 우리 아이들 어릴 적에 카드를 쥐어준 적이 있어요. 아주 신나서 온갖 음식을 아무 때나 사먹더군요. 안 되겠다 싶어 마음은 무거웠지만 카드 한도를 정했죠. 그 뒤로 아이들의 식습관이 좀 나아졌어요. 습관 고치는 것도 약 먹는 것도 모두 이런저런 핑계로 봐주지 말고 일관성 있게 지켜야 해요."
이 원칙만 지켜지면 어른과 달리 소아 성인병은 깨끗이 완치될 수 있다. 가령 고지혈증은 20세 이전에 치료하면 혈관 안에 쌓인 지방이 완전히 제거되지만, 30대 이후면 대부분 동맥경화로 악화하기 때문에 원래대로 회복하기 어렵다. 더구나 수십 년째 몸에 밴 생활습관을 바꿔야 하는 어른보다 소아의 습관 교정은 더 쉽고 효과도 높다.
"치료 후 아이들 삶의 질이 확 달라지는 게 보여요. 미래의 환자를 한 사람 한 사람씩 줄여가는 거죠. 그게 가장 큰 보람입니다."
임소형기자 precar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