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정권은 대통령 취임 후 여론 무마를 위해 사회정화를 전면에 내세웠다. 1981년 국무총리에게 "근간 신체장애자 구걸 행각이 늘어나고 있다는 바, 실태 파악을 해 단속 보호조치하고 결과를 보고해주기 바란다"는 지휘서신을 내렸다. 일주일 만에 부랑인 수 천명이 수용시설에 강제 구금됐다. 부산 형제복지원은 이런 분위기 속에 전국 최대 부랑인수용소로 커질 수 있었다. 원장 박인근은 국민포장과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고 평통 상임위원에 임명되는 등 거물이 됐다.
■ 1987년 우연히 형제복지원 인권유린 실태를 접하고 수사에 착수한 김용원 당시 울산지검 검사는 처음부터 적잖은 어려움을 겪었다. 법무장관과 검찰총장이 나서 가혹행위와 강제노역 수사를 확대하지 말도록 압박했다. 국고보조금 횡령 액수는 대폭 줄이도록 했고 구형량도 최대한 낮출 것을 지시했다. 사법부도 석연치 않은 것이 1심에서 징역 10년이었으나 점점 형량이 줄어 대법원에선 징역 2년6개월에 그쳤다. 불법감금 부분은 무죄판결이 났다.
■ 형제복지원 생존자 한종선씨는 재작년 펴낸 체험수기 에서 생지옥 같았던 수용소 생활을 폭로했다. "먹을 게 없어 지네와 생쥐까지 잡아 먹었다. …구타는 3,000명 전부가 당했고, 아무 것도 안 먹이고 무릎 꿇리고 손발 묶어놓고 잠을 재우지 않았다. …힘센 경비들과 조장들, 소대장들이 어리고 예쁘장한 아이들을 성폭행했다. …엄청나게 맞아 병원에 실려간 뒤 안 돌아오면 너희들도 말 안 들으면 그 꼴 난다고 협박했다."
■ 민주당 진선미 의원 등 야당 의원 50명이 25일 진상규명과 피해자 지원을 위한 특별법을 발의했다. 잔혹한 인권유린 실태와 함께 국가기관의 비호 여부도 반드시 밝혀내야 한다. 무엇보다 12년간 사망한 513명의 사인 규명이 시급하다. 형제복지원 기록에는 고혈압, 뇌졸중, 폐결핵 등 대부분 병사로 처리돼 있지만 상당수가 구타로 숨진 뒤 뒷산에 암매장 됐거나 병원에 해부용으로 팔려갔다는 증언이 있다. 삼청교육대와 함께 국내 최대 인권유린 사건을 이대로 묻어둘 수는 없다.
이충재 논설위원 cj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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