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금바리 맛난 거 다 안다. 말고기 육회 먹을 줄도 알고 한라봉 모히토가 얼마나 섹시한 빛깔인지도 안다. 그건 내 앞자리 대학생 인턴기자도 알고 이 기사를 데스크 보면서 끌끌 혀를 찰 우리 부장도 알고 어떻게든 여자 친구를 꼬드겨 함께 제주도로 떠날 꿈에 빠진 열아홉 살짜리들도 알 텐데, 어쩌랴, 우리가 모두 부자일 수는 없는 것을. 그렇다고 제주도까지 가서 편의점 도시락을 먹자니 페이스북에 로그인할 면목이 없다. 그래서 찾아봤다. 등골이 휘어지지 않고도 능히 벗들이 '좋아요'를 클릭하게끔 만들 제주도의 메뉴가 없을까. 결론. 꽤 많다. 가격이 시간당 법정 최저임금(5,210원)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제주 별미를 모아 정리했다. 이를테면 88만원 세대와 그 언저리 세대를 위한 'B급 제주 구르메(미식) 투어' 가이드.
너희가 순대를 아느냐
갈치부터 떠올리기 쉽지만 제주 출신에게 제주를 대표하는 음식을 물으면 십중팔구 대답은 돼지다. 이곳 말로 '돗'. 제주도 잔칫집에 돗고기가 없다면 그건 잔치가 아니다. 제주도의 애경사는 도새기(새끼 돼지)를 그슬러 된장을 바르는 것에서 시작한다. 창자도 버리는 법이 없었다. 비싼 쌀은 꿈도 못 꾸고 보릿가루나 조, 메밀을 굵은 창자에 채워 두툼하게 만들었던 게 제주식 순대다.
"수애(순대) 만들 땐 하루 종일 쉬지 않고 창자를 씻어야 해요. 요즘 젊은 사람들은 힘이 들어서 그런 일 못해요. 그래 진짜 수애를 먹으려면 주인이 나이가 좀 돼 보이는 집을 가세요. 그런 집에 가야 직접 만든 수애를 쓰지."
제주시 일도1동 순대고을 대표 양옥임(65)씨에 따르면 요즘 보리좁쌀이나 메밀가루를 넣어 만드는 순대는 찾아보기 힘들다. 대부분 찹쌀을 쓰고 풋마늘, 쪽파, 미나리, 깻잎 등을 넣어 만든다. 그래서 돼지 냄새는 생각만큼 심하지 않다. 하지만 만드는 방식은 옛날 그대로다. 굵직한 두께와 뻑뻑한 질감. 물컹한 육지 순대와는 무척 다른 느낌이다. 제주도 순대의 오리지널을 느끼고 싶다면 표선읍 가시리로 가볼 것. 돼지 잡는 날이면 깃발을 올리는 오래된 식육점들이 여기 모여 있다. 순댓국 한 그릇의 공정가는 5,000원.
몸, 갱이, 보말, 멜… 제주의 국물맛
제주도 메뉴판엔 육지에선 접하지 못했던 보캐블러리가 붙은 국이나 죽이 많다. 그래서 주문하기가 괜히 겁난다. 하지만 의외로 붙임성 있는 맛들이다. 이름만으론 정체성을 파악하기 힘든 몸국의 '몸'은 모자반을 지칭하는 제주도 말이다. 돼지고기를 흐물흐물해질 때까지 푹 삶은 육수에 몸을 넣고 끓인 것인데 역시나 잔칫집 음식이다. 가마솥에 열 시간 이상 끓여야 제 맛이 난다니 튼실한 솥이 있는 집을 찾아갈 것. 5,000~6,000원.
'갱이'는 게를 뜻하는 제주도 말이다. 제주에선 게를 껍질까지 먹는다. 옛날엔 절구에 게껍질을 넣고 빻았다는데 지금 그런 정성까지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대신 요즘엔 게살도 함께 넣어주니 알큰한 맛과 보드라운 맛을 함께 즐길 수 있다. 죽으로 만들어 파는 값이 6,000~7,000원 정도.
'보말'은 고둥이다. 이놈의 오지랖이 참으로 넓다. 죽과 국은 물론 밥 짓고 국수 삶고 라면 끓이는 데도 들어간다. 제주도에 "보말에 맛 들이면 전복은 쳐다도 안본다"는 말이 있다. 죽보다 국이 싼 편. 7,000원 안팎.
'멜'은 멸치를 뜻하는 제주 방언이다. 제주 사람들의 멜 사랑은 유별나다. 봄철엔 멜국이 일품. 4월부터 잡히는 씨알 굵은 놈으로 국을 끓인다. 따로 육수를 쓰지 않고 맑은 물에 멜과 봄동, 마늘, 소금만 넣고 팔팔 끓이면 끝. 예전엔 갈칫국이나 멜국이나 값이 비슷비슷했다. 이제 갈칫국 값은 한 그릇에 만원을 훌쩍 넘어가 버렸지만 멜국은 아직 6,000원선. 모슬포나 협재 쪽에 싸고 맛있는 집이 많다.
제주 농촌의 차진 맛, 오메기떡과 빙떡
올레길을 걷는데 비상식으로 에너지바를 사서 배낭에 넣긴 좀 그렇다. 근사한 대안은 오메기떡. '오메기'는 검은 차조를 뜻하는 제주 사투리다. 그 맛을 본 사람들이 뭍으로 돌아가서도 택배로 부쳐 먹을 만큼 인기다. 차조에 찹쌀, 야생 쑥을 넣어 반죽한 뒤 팥소를 넣고 겉에 통팥을 버무려 만든다. 지금은 오메기에 비해 찹쌀의 비중이 높지만 이름은 여전히 오메기떡. 현대식 오메기떡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집은 제주시내 동문시장의 진아떡집이다. 8개 한 상자 3,000원. 3대째 오메기떡을 만들고 있는 이승열(69) 할머니는 상당히 까칠했다.
"아, 그만 좀 찍읍소. 귀찮게시리. 안 그래도 주문이 너무 밀려 힘들어 죽겠는데…밥 대신? 하나(8개)면 족하지. 이게 속이 꽉 차 있거든."
크레페처럼 생긴 빙떡은 강원도의 메밀전병이랑 비슷하다. 평평한 팬(전엔 솥뚜껑)에 기름을 두르고 묽은 메밀반죽을 둘려 얇은 전을 만든다. 그걸로 무채 볶음을 싸서 먹는다. 심심한 메밀의 맛에 심심한 무 맛이 더해져 빚어지는 결코 심심하지 않은 맛. 제주도 오일장 어딜 가나 빙떡을 부치는 할머니를 볼 수 있다. 한 개 600원. 값은 싸지만 맛과 영양이 어엿한 전통 음식이다. 무에 해독 효과가 있어 메밀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도 먹을 수 있다.
비주얼의 종결자 꽁치김밥
서귀포시 올레시장에 가면 강렬한 비주얼의 김밥을 만날 수 있다. 척추동물이 한 마리 통째 들어가는, 아마도 유일한 김밥. 꽁치김밥이다. 꽁치는 김밥용 김보다 정확히 대가리와 꼬리의 길이만큼 더 긴 것을 쓴다. 생선 한 마리를 멍석말이 해 놓은 것 같이 생겼다. 그런데 이 김밥에 얽힌 사연이 자못 짠했다. 꽁치김밥을 만들어 파는 우정회센터 강지원(41) 대표의 얘기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서 중학교 졸업하고 바로 횟집에서 일했어요. 불쌍해 보였는지 실장님(조리사)이 김밥을 싸주곤 했는데 그 안에 짭짤하게 구운 꽁치 한 마리가 들어 있었어요. 배고프던 시절 그게 얼마나 맛있었던지…나중에 횟집 차리고 단골들한테만 '스키다시'로 그걸 만들어 드렸는데 너도나도 찾으시네요."
작년까지 한 줄에 3,000원 받던 꽁치김밥 가격을 올해 초 4,000원으로 올렸다. 그래도 남는 게 없다. 뼈를 발라 내고 특별히 만든 소스로 비린 맛을 잡고 김밥을 싸느라 직원 한 명을 따로 둬야 하기 때문이다. 가게는 올레시장 화물차 주차장 바로 옆이다.
호떡과 모닥치기, 제주의 주전부리
제주시 동문시장엔 호떡거리가 있다. 말이 거리지 아케이드 한 쪽에 포장마차 네댓 개가 다다. 한창 때는 열 개가 넘었다지만 이젠 요만큼 남았다. 그래도 제주에서 나고 자라 학창시절을 보낸 30, 40대는 지금도 고향에 도착하면 여기부터 찾는다. 두께가 족히 육짓것의 두 배는 되는데 가격은 똑같이 500원. 36년째 호떡을 만들어 파시는 할머니는 "32년 동안 값이 딱 10배 올랐다"고 했다. 싱싱한 채소를 가득 넣은 채소호떡, 야생 쑥을 넣은 쑥호떡도 값이 같다. 입안 가득 퍼지는 기름내. 거부할 수 없는 중독성을 지닌 맛이다.
"그 사람들 욕할 거 업수다. 순진하게 장사만 한 우리들 탓이지."
제주도의 분식집엔 '모닥치기'가 있다. 뭘까. 모닥치기란 '여럿이 함께 힘을 합쳐 한다'는 뜻의 제주도 방언이다. 분식집의 모둠 메뉴를 가리키는 말. 원조인 서귀포 올레시장 새로나분식의 구성 메뉴는 김밥, 떡볶이, 만두, 김치전이다. 모닥치기를 만들어 판 지 18년 됐다. 주인 한이순(75) 할머니는 순댓국집을 하다가 재미를 못 봐서 분식집을 시작했단다. 역시 재미는 못 봤다. 그러다 '에라, 한 번 섞어 볼까' 했던 발상의 전환이 대박이 났다. 이젠 이 집, 저 집 다 모닥치기라는 간판을 달고 있다. 한 할머니는 상표권에 대한 미련이 크지 않아 보였다. 맛은 따라올 수 없을 거라는 자부심 때문.
제주도 분식집에서 모둠 메뉴가 발달한 건 이곳 떡볶이에 국물이 많기 때문이다. 적정한 점도가 유지되는 흥건한 국물이 모닥치기 맛의 핵심이다. 1인분 3,000원, 2인분 5,000원.
모슬포 쪽으로 가면 또 다른 별미가 있다. 감귤호떡. 김경수(44) 이은경(34) 부부가 운영하는 작은 가게다. 뜨겁게 튀긴 호떡 속에 씹히는 상큼한 귤맛! 메뉴는 채소호떡과 감귤호떡 두 가지다. 채소호떡부터 먹고 새콤달콤한 감귤호떡을 먹는 게 순서다. 가격은 똑같이 1,500원. 사실 비공식 메뉴가 하나 더 있다. 컵밥. 학교 마치고 학원 가는 이 동네 학생들에게만 제공하는 메뉴인데 적당히 불쌍한 표정을 지으면 여행자도 맛볼 수 있다. 꽤 든든하다. 컵밥도 1,500원.
담백한 고기국수와 해물이 범람하는 짬뽕
고기국수는 일본 돈코츠라멘과 비슷하지만 맛은 훨씬 담백하다. 비리지 않을까 싶은데 제대로 된 집이라면 놀라울 만큼 맛이 깔끔하다. 마늘, 생강, 통후추 등을 넣고 오랫동안 끓인 돼지육수를 깨끗하게 걸러내는 것이 핵심. 굵은 면발은 쫄깃하지 않고 툭툭 잘 끊어지는데 그게 돼지고기 식감과 어울린다. 면 위에 올리는 오겹살은 보들보들 입 속에서 녹는 질감이 마치 설탕으로 빚은 듯하다. 고추 다대기로 살짝 양념해 먹는다. 제주도 어디나 5,000~6,000원 정도.
제주도와 바다의 친연성을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을 듯. 제주도 중국집에 가면 누구나 짬뽕을 시키게 된다. 서귀포 시내의 덕성원은 역사가 100년 가까이 된다. 화교가 운영하는데 주 메뉴는 게 한 마리를 통째 담아 주는 꽃게 짬뽕. 개운한 맛이 일품이다. 7,000원.
모슬포 포구 가까이 있는 홍성방 짬뽕에는 해물이 범람한다. 쫄깃한 면발을 오징어가 덮고 있고 그 위에 홍합이 쌓였는데 꽃게 한 마리가 또 그 위에 좌정하고 있다. 살짝 비싼 8,000원. 쇠소깍 부근에 짬뽕으로 유명한 집이 하나 더 있다. 아서원. 돼지육수와 푸짐한 해물이 어울린 맛에 중독된다. 6,000원.
제주=글ㆍ사진 유상호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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