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재호 전 대주그룹 회장의 일당 5억원짜리 '황제 노역'이 거센 비판을 받자 법원이 벌금액에 따라 노역 기간 하한선을 두는 개선안을 유력하게 검토하고 있다. 허 전 회장의 경우 벌금 254억원을 노역 50일로 대신할 수 있도록 판결했는데, 이 정도 벌금액은 노역 기간을 1,000일로 설정하는 식이다. 이 경우 노역 일당은 2,540만원으로 떨어진다.
25일 대법원 등에 따르면 28일 예정된 전국 수석부장판사회의에서 벌금형 환형유치 제도개선이 논의된다. 이 자리에서 벌금액에 따라 노역 기간에 차등을 두는 방식이 주로 논의될 예정이다. 법원 관계자는 "벌금액이 수백억 원에 달하는 경우 노역 일당의 상한선을 정한다고 해도 노역 기간이 짧으면 문제가 될 수 있다"며 "벌금액에 따라 노역으로 면제받을 수 있는 기간을 차등 설정해 국민들이 납득할 만한 기준을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현행법에는 벌금을 노역으로 대신할 수 있는 기간만 최장 3년 이하로 규정돼 있고, 일일 환산액을 얼마로 할지는 판사의 재량이다. 이번 사건에서 이 재량의 결과가 상식에 반해 문제가 된 만큼 법원 내부에서 가이드라인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앞서 21, 22일 서울중앙지법 형사부 판사들이 워크숍에서 황제 노역 방지를 위한 제도 개선을 논의한 결과도 노역 기간의 기준 설정에 초점이 맞춰졌다. 법관들은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조세) 위반으로 고액벌금을 선고하는 경우 노역장 유치일수(기간)에 하한기준을 설정하는 방안 ▲현재 1일 환산액수만 특정하는 판결 주문에 노역장 유치일수도 넣도록 하는 방안 ▲국회에서 계류 중인 독일식 일수벌금제(소득수준에 따른 벌금 차등부과) 적용방안 등을 놓고 논의를 확대해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은 것으로 알려졌다.
유럽 등에서 도입된 일수(日數)벌금제는 재산ㆍ소득에 따라 같은 범죄라도 벌금액수를 달리해 근본적으로 벌금제의 형평성을 높이는 제도다. 차량 과속으로 걸린 재벌에게 수억원의 벌금이 부과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같은 범죄는 법에 정해진 벌금만 부과하도록 돼 있어 자녀를 외국인학교에 부정입학시킨 재벌가(家) 며느리들이 겨우 벌금 1,500만원만 선고 받았다.
일수벌금제는 현재 국회에 법안이 계류 중이며, 정치권과 법무부가 1992년과 2009년 두 차례 도입을 추진했으나 무산된 바 있다. 대법원 관계자는 "일수벌금제를 도입하면 경제수준에 따라 1일 노역으로 면할 수 있는 벌금액이 달라지기 때문에 노역장 유치기간의 형평성이 높아질 수 있다"면서도 "재산에 따라 벌금액이 들쑥날쑥 해지면 또 다른 형평성 논란이 불거질 수 있고 우리나라의 경우 개인의 재산을 정확히 측정하기 힘들다는 문제점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법조계에서는 우리나라도 소득파악율이 높아진 만큼 일수벌금제 도입을 더 이상 미뤄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도 많다.
28일 수석부장판사회의에서 논의된 결과는 지방법원 별로 다시 논의를 거치게 된다. 대법원 관계자는 "가장 규모가 큰 서울중앙지법 형사법관 회의에서 합의해 공지하면 전국 법원에서 따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12월 서울중앙지법 형사법관 회의에서 벌금형 환형유치 기준금액을 1일 5만원에서 10만원으로 올린 뒤 전국 법원으로 확대됐다.
김청환기자 ch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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