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한 여자가 있다. 복색과 말투로 보아하니 조금 전까지 1950년대를 살다 온 20대 사람이다. 2014년 어느 날 서울 수색역 인근 지하 폐선로 한복판에 증기기관차가 거짓말처럼 나타났고 여성은 휴전협정 직후인 1953년 7월 부산을 출발해 서울로 향했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던 바로 이 '환도열차'의 유일한 생존 승객이다. 시공간의 틈새를 의미하는 웜홀(wormhole)을 통해 60년을 추월한 여성이 등장했다는 소식을 만약 오늘밤 뉴스로 듣는다면 대체로 비현실적인 '허풍'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연극 '환도열차'(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ㆍ3월14일~4월6일)의 골격을 이루는 이 설정은 무대에서 지극히 현실적이며 진실처럼 다가온다. 가짜가 판치고, 현실이라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들이 차고 넘치는 2014년 한국에 비하면 오히려 60년 전 과거에서 갑작스레 뛰쳐나온 여성의 모습이 우리가 바라온 어느 지향점, 즉 가장 이상적인 상태와 가깝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지난해 대한민국 연극상 대상을 수상하며 주목받은 장우재 작ㆍ연출의 '환도열차'는 시공간의 장막을 뚫고 현대에 출연한 1950년대 젊은 여성 지순(김정민)을 앞세워 그 어떤 허구보다 허구에 가까운 현실의 모순을 보다 두드러지게 그려낸다.
지순의 등장은 과거에 묻어두고 싶던 한국 현대사의 민낯을 빠짐없이 소환한다. 신분을 속이고 살아온 덕에 재벌이 된 지순의 남편 한상해(윤상화)의 악행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전쟁터보다 더 전쟁 같은' 서울의 현실이 얼마나 지독한지가 50년대에서 날아온 지순의 감각들을 통해 묘사된다. 조사관 제이슨 양(이주원)에 이끌려 현대의 서울을 둘러보는 지순은 "내 눈엔 그렇게 보이는데 그 짝 눈엔 그게 안 보여요?"라며 썩은 내 나는 2014년에 혀를 찬다.
연극 '환도열차'에는 한국전쟁 후 60년을 관통하는 현대사에 대한 은유가 가득하다. 경제부흥의 선발대라는 훈장을 차고 있지만 살인과 술수로 평생을 산 상해, 그리고 사익을 위해 핵심기술을 빼돌리고 상해의 양자가 된 동교(안병식)는 휴전 이후 지긋지긋하게 유전되고 있는 술책의 현대사를 상징한다.
지순이 1953년 부산 피난민촌에서 석홍(소성섭)으로부터 듣고 기억하는 '눈먼 왕(오이디프스 왕)'이야기는 2014년 서울에서 공교롭게 실현된다. 동교의 총에 맞아 눈에서 피를 흘리는 상해, 그리고 상해가 쏜 총에 다리를 저는 제이슨의 모습은 비극의 상징 '오이디푸스'를 정확히 연상케 한다. 과거를 달리다 터무니없이 현대로 뛰어든 환도열차와 승객 지순을 통해 연출이 관객에 던지려 한 메시지는 오이디푸스처럼 비극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현대인의 아픔이다.
시놉시스는 판타지 소설을 닮았지만 무대에서 목격한 '환도열차'의 겉모습은 스펙터클하지 않다. "그림 보다 이야기를 만드는 연출가"를 자임하는 장우재의 연극답게 인물 묘사와 탄탄한 갈등 배치만으로도 그 어떤 SF 영화보다 박진감을 낸다. 어찌 보면 텅 빈 감옥 같은 박상봉의 무대 디자인은 단단한 긴장을 끝까지 쥐게 이끈다.
양홍주기자 yangh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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