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생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소녀는 철저한 이방인이었다. 1970년대 독일 함부르크는 한국인커녕 동양인도 흔치 않았다. 소녀는 학교에서 유일한 동양인이었고 몇 년 뒤 두 번째 동양인이 입학했다. 소녀의 여동생이었다. 고립무원이었던 10대 시절 소녀는 텔레비전으로 한국영화와 처음 만났다. 임권택 감독의 '만다라'(1981)였다. 영화를 보며 소녀는 한국인의 정체성을 어렴풋이 느꼈다. 소녀는 훗날 독일 감독 빔 벤더스의 '돈 컴 노킹'(2005) 등의 프로듀서로 일을 하게 됐다. 재미 영화제작자 이인아씨가 들려준 자신의 지난 날이다.
23일 밤 방송에서 '길소뜸'(1985)을 봤다. 한국전쟁 통에 생이별하고 아들까지 잃어버린 남녀가 30년 만에 해후하고 핏줄과 상봉하는 모습을 그린 영화다. 아들로 여겨지는 사내를 만나고서 여인은 현실을 강하게 부정하려 한다. 차에 치인 개를 보고 몸에 좋은 고기라며 눈을 희번덕거리거나 사람의 죽음을 돈벌이에 활용하는 비법을 무용담처럼 떠벌리는 사내 앞에서 여인은 치를 떤다. 어렵게 이룩한 부와 단란한 가정이 뒤늦게 찾은 아들 때문에 흔들릴까 두렵기도 하다.
무정하게 돌아서는 여인을 보며, 세월 앞에선 물보다 진할 수 없는 피의 무기력이 느껴지는 영화였다. 임권택 감독은 한 민족이면서도 융화되기 쉽지 않은 남북한의 현실을 세 사람의 비극에 빗대어 은유한다. 어떤 소재로든 우리 삶의 과거와 현재를 놓지 않는 임 감독의 고집은 '길소뜸'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한 때 해외에서 한국영화와 동의어로 통했고 국내에선 완성도와 상업적 성공을 한꺼번에 성취했던 임 감독의 저력이 새삼 느껴졌다.
임 감독이 그의 102번째 영화 '화장'의 완성을 눈 앞에 두고 있다. '화장'은 말기 암환자인 아내를 간호하면서도 젊은 직장 부하에게 마음이 끌리는 50대 남자 오상무(안성기)의 이야기다. 소설가 김훈의 동명 소설이 바탕이다. 올 1월 1일 크랭크인해 이달 8일 촬영을 마쳤다. 임 감독의 최근 영화 중 가장 빠른 속도다. 얼마 전 1차 편집을 끝냈다는 후문이 들린다. 임 감독의 전작들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수작이라는 소문이 떠돌고 안성기가 일생일대의 연기를 펼쳤다는 말도 들린다. 임 감독은 자연 풍광에 기대 역사의 굴곡에 휘말린 인물들의 아픔을 묘사하곤 했는데 이번 영화는 안성기의 얼굴에 집중했다고 한다. 대가가 한 중년 남자의 내면 풍경을 렌즈로 우리 사회의 현실을 어떻게 포착했을지 궁금해진다.
'화장'은 5월 열리는 칸국제영화제를 겨냥하고 있는데 그 가능성을 반신반의하는 영화인이 적지 않았다. 완벽을 추구하다 일정을 넘기기 일쑤였던 노대가의 작업 스타일때문이었다. '화장'의 유례없는 속도전은 칸 입성을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날림 우려도 있지만 제작사가 '충무로 품질보증마크'인 명필름이다. 기대를 품기 충분하다. 칸영화제 초청작 명단은 내달 발표된다.
한국영화계 거장이 칸에 갈지를 한국 축구의 월드컵 최종 예선 통과를 바라보듯 하는 태도가 불경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임 감독이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 받아 대상인 황금종려상을 거머쥐는 모습은 상상만해도 흐뭇하다. 황혼에 이른 연령 때문에 해가 갈수록 임 감독의 신작이 더할 나위 없이 귀하다. 올해 한국영화 기대작을 꼽으라면 주저하지 않고 말하겠다. '화장'이라고.
라제기 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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