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크대와 그릇 수납장, 가스레인지와 환기팬으로 이뤄진 오늘날의 부엌은 어떻게 탄생했을까. 현재 거의 일반화된 표준형 부엌은 많은 이들이 생각하듯 문제 제기와 수정 보완을 거쳐 서서히 자리잡은 것이 아니다. 운석처럼 어느 날 뚝 떨어진 현대식 부엌의 효시는 오스트리아 최초의 여성 건축가 마가레테 쉬테-리호츠키가 1926년 설계한 '프랑크푸르트 부엌'이다.
쉬테-리호츠키는 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에서 진행된 주택 건설 프로젝트에 참여해 혁신적인 부엌을 제안했다. 목표는 최소 면적 안에서 최대 효율을 거두는 것. 그는 6.5㎡ 안에 필요한 모든 것이 갖춰진 일체형 표준 설비에 도전했다. 프랑크푸르트 부엌은 붙박이 형태의 싱크대와 수납장, 식기 건조대를 빈틈 없이 배치한 최초의 시스템 부엌이다.
식기 건조대는 수납장 바로 아래 설치해 동선을 최소화했고, 냄비 건조대는 바닥을 기울여 세척 후 걸어놓기만 하면 저절로 물기가 빠지도록 했다. 싱크대는 다리를 없애고 바닥에 완전히 밀착시켜 청소하는 수고를 덜었고, 알루미늄으로 만든 양념통에는 내용물의 이름과 눈금을 표시했다. 심지어 페인트 색깔까지 파리가 달라붙지 않는 것으로 연구해(비둘기 색이 그렇다고 한다) 채택했다는 후일담을 듣고 나면 그 효율성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서울 사간동의 금호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키친-20세기 부엌과 디자인'전은 부엌에 급격한 혁신이 일어났던 1920년부터 현재까지, 부엌의 한 세기 역사를 조망한다. 프랑크푸르트 부엌을 비롯해 부엌 역사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 빈티지 부엌 13점과 그릇, 도구, 가전 등 주방용품 400여점이 나왔다.
부엌의 역사가 흥미로운 것은 그 안에 담긴 진한 시대성 때문이다. 비행기 기내 화장실처럼 빽빽이 짜인 프랑크푸르트 부엌은 지금 보면 마치 합리성과 효율성이라는 근대정신을 표현하는 거대한 설치작품 같다. 1950년대 디자이너 레이몬드 로위가 디자인한 '룩 키친'도 마찬가지다. "디자인의 목표는 판매"라는 논쟁적 주장을 펼쳤던 로위는 코카콜라 자동판매기, 럭키 스트라이크 담뱃갑, 펩소던트 치약 등을 디자인하며 미국 소비문화의 풍경을 바꿔 놓았다. 그는 증기 기관차 속도를 극대화하려고 앞부분을 둥글게 만든 것에서 착안, 부엌 디자인에 유선형을 적용했다. 유려하게 둥글린 모서리와 반들반들한 광택, 이음새 없는 매끄러운 실루엣의 '룩 키친'은, 기술의 발전이 장밋빛 미래를 가져올 거라 믿었던 당대의 들뜬 분위기에 더할 나위 없이 부합하는 것이었다.
효율이라는 시대적 사명에 화답하기 위해 주방도구도 눈부시게 발전했다. 떨어뜨려도 깨지지 않는 컵, 고온의 오븐 속에서도 멀쩡한 유리 그릇, 뚜껑을 닫기만 하면 완전히 밀폐되는 음식 보관통 등. 주부들의 열렬한 지지를 얻으며 주방 용품의 역사를 새로 쓴 브라운, 터퍼웨어, 르크루제, 파이렉스의 초창기 제품들이 전시장 한 켠을 자랑스레 차지하고 있다.
지하 전시장에는 예술가들이 만든 주방 용기가 전시돼 있다. 지난 세기의 모든 예술가들은 디자인과 예술의 관계에 대해 말할 준비가 돼 있어야 했다. 누군가는 디자인의 조형성을 강조했고 또 누군가는 디자인을 예술로부터 떼어내려고 발버둥을 쳤다. 20세기 초 바우하우스에서 수학한 독일의 빌렘흘 바겐펠트는 후자였다. "디자인과 예술의 작업방식은 동일한 점이 거의 없다"고 주장한 그는 대량생산 시스템에 맞춘 실용적 용기들을 디자인했다. 그가 1938년 제작한 사각형의 유리 용기는 우리가 현재 쓰는 락앤락과 매우 흡사하다. 비록 가벼운 플라스틱 뚜껑도, 우수한 밀폐력도 없지만 근 한 세기 앞선 디자이너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어 흥미롭다. 전시는 2층, 3층 지하 1층 순으로 보는 게 효율적이다. 6월 29일까지.
황수현기자 so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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