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섭은 과학과 인문학을 어떻게 배신했는가'라는 도발적인 부제부터 눈에 띈다. 웬만한 영어사전에도 나오지 않는 어려운 단어 'consilience'를 번역한 통섭(統攝ㆍ큰 줄기를 잡다)은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합쳐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범학문적 연구를 뜻하는 말로 자리잡았다.
미국 사회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의 저서 (Consilience: The Unity of Knowledgeㆍ1998)를 제자인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가 원효 대사가 쓴 말인 '통섭'으로 번역하면서 국내에 본격적으로 알려졌는데, 요즘 이 말은 지식 통합이라는 보통명사가 됐다. 다른 영역 간 교류를 내포하고 있어 소통의 동의어처럼 쓰이기도 한다.
는 박근혜 정부가 내세운 창조경제의 핵심 키워드의 하나로 부상한 바로 그 개념, 통섭을 비판했다. 통섭의 오류를 꾸준히 지적해 온 학자와 전문가 13인의 논문과 에세이를 모았다.
개별 학문 간 간극과 장벽이 너무 높았던 국내 학계 현실에서 통섭이란 화두는 경계를 허물고 학제 간 협력을 이끄는 순기능적인 역할을 해왔지만 저자들은 불투명하고 다의적으로 쓰이는 통섭의 오류를 지적한다. 우선 미국 물리학자 앨런 소칼이 도발한 '지적 사기' 논쟁부터 소개한다. 지적 사기 논쟁은 라캉, 들뢰즈 등 현대 프랑스 철학자들이 자연과학 개념을 오용한 사례를 들춰냄으로써 자연과학자와 인문학자 간에 존재하는 지적 사기를 제기한 사건이다.
저자들은 윌슨이 말한 통섭에 대해서도 선언적인 외침보다 자연과학과 인문ㆍ사회과학이 서로 이해하려는 노력을 더 많이 기울이는 게 먼저라고 강조한다. 특히 윌슨의 발상이 인문학을 자연과학에 종속시키는 '환원주의적 통섭'이라고 비판한다. 김상현 전 동국대 명예교수는 "윌슨의 컨실리언스는 통합과 융합의 치료제가 아닌 종속과 포섭으로 가는 위약(僞藥)이라는 지적을 받고 있다"고 일침을 가했다.
박준건 부산대 교수는 "윌슨의 사회생물학은 인간의 자기이해를 위한 참고사항일 뿐이며 인문학과 사회과학은 무반성적으로 자연과학을 받아들이고 있다"고 했다. 그는 또 "인간은 생물학 존재이면서 역사적, 사회문화적으로 대단히 역동적인 존재라 복잡하고 역설적이며 어떤 경우는 모순적"이라며 "따라서 성급한 단순화는 문제를 일으킨다"고 덧붙인다.
이남인 서울대 교수는 학제적 연구가 통섭 프로그램에만 국한되면 이는 현실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진정한 의미의 학제적 프로그램이 될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한국 사회에서 통섭이 유행처럼 번지면서 대학가에서 통섭학과, 통섭대학, 통섭대학원 등을 설립하려는 움직임이 있는데 철저한 학문적 성찰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일상에서 개념의 모호성은 용납되지만 학문세계는 사정이 다르고, 특히 대학, 대학원 등에서 관련 기관을 신설할 때에는 연구와 교육목표뿐만 아니라 그 기관의 사명을 명확히 기술돼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저자들은 범학문적 접근에는 동의하지만 과학이 다른 학문의 우위에 있다는 자연과학 만능주의를 우려하며 편파성을 경계한다. 동시에 지식 융합을 실질적으로 실천하라고 강조한다. 구호를 넘어서는 학제적 협력이나 환원주의와 비환원주의를 적절히 배치하는 메타적 통합 프로그램이 아직 부족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학문 간 소통, 협력, 경계 넘나들기, 통합 필요성에 대한 인식은 뚜렷해졌지만 주제에 관한 엄밀한 사고와 비판적 토론은 아직 미미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 이제 통합 개념을 명확히 세우고 실현 가능한 통합의 그림을 그리며 이를 위한 효율적 방법을 모색하기 위한 연구와 토론을 진행해야 한다." 이 같은 고인석 인하대 교수의 말은 통섭에 대한 찬반논쟁과 상관 없이 생각할 거리를 많이 남긴다.
김소연기자 jollylif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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