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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계절의 동거

입력
2014.03.21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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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광주에 강연하러 갈 일이 있었다. 아침 강연을 마치고 모처럼 담양의 원림과 정자들을 누리기 위해 무등산 고개를 넘었다. 고갯길 입구에 들어서기도 전에 난데없이 눈이 내렸다. 3월의 눈이라니! 그것도 남쪽에서! 묘한 느낌이었지만 그날이 마침 화이트데이라나 뭐라나 하는 날이어서 딱 들어맞는다 싶기도 했다. 고갯마루에 들어서자 산의 모든 나무들이 뽀얗게 설화를 피워낸 게 장관이었다. 길가 늘어서 나무는 마치 벚꽃이 만개한 양 하얀 커튼을 드리운 느낌이었다. 길에 내린 눈만 걷어내며, 사진으로 찍으면 영락없는 벚꽃의 절정이었다.

딱히 꽃샘추위랄 것도 없이 미지근한 지난 겨울을 끝자락까지 엉거주춤하게 건넌다 싶었는데 느닷없이 내린 눈은 초대받지 않은 손님처럼 낯설었지만 어색하진 않았다. 계절의 별미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겨울을 통과하는 환각도 잠시뿐 눈은 금세 멈췄고, 내려가는 고갯길은 이미 녹기 시작한 눈물(이건 눈의 '눈물'인지, 눈의 '물'인지!)을 흥건히 받아내고 있었고 숨어있던 햇살까지 넉넉하게 품고 있었다.

모처럼 찾은 소쇄원은 뜻밖에 사람들이 없어서 마음껏 둘러보고 마루에도 앉아 햇살도 누리면서 여유를 부렸다. 멀리 산 계곡에서 녹아 흐른 물은 광풍각 앞자락에 치마처럼 드리운 바위를 타고 조잘대는, 완연한 봄이었다. 제월당 마루에 앉아 바라보는 산수유의 깔끔함은 금방 지나온 눈꽃의 터널을 까맣게 잊게 할 만큼 매혹적이었다. 식영정, 명옥헌, 면망정으로 이어지는 담양의 빼어난 정자와 원림들은 아직 꽃을 품거나 봄잎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기품으로 봄을 품고 있었다. 제법 가파른 계단을 올라서 있는 면앙정에서 맞는 바람 끝이 제법 칼칼했지만 이미 순해진 건 어쩔 수 없는 봄이었다.

내친 김에 다다른 담양의 죽록원 대밭은 겨우내 품었다 뿜어낸 초록 기운으로 가득했다. 대나무 사이를 헤집고 들어오는 바람결과 사각사각 속삭이는 댓잎의 수다는 어린것의 달콤한 옹알이처럼 살가웠다. 그런데도 여전히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겨울 끝자락, 기껏해야 봄의 문턱을 이제 갓 넘은 까닭에 상춘객은 나서지 않은 까닭이리라. 꽃도 피지 않았고, 잎도 내지 않았으니 아직은 쓸쓸한 겨울 끝자락을 지닌 나무들이며 들판을 일부러 찾고 싶지 않은 까닭이고, 봄의 한복판에서 마음껏 누려보고 싶은 심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생각을 조금 바꾸면 이게 나들이의 별미라는 걸 알 수 있다. 한 계절에서 다음 계절로 넘어가는 그 길목이야말로 두 계절을 맛볼 수 있는, 짧지만 흔치 않은 색다른 맛이다. 그걸 일부러 찾아 즐기는 이들이 그리 많지는 않은 듯한데, 그래서 분접함 하나 없이 오롯하게 마음껏 누릴 수 있는 호사를 외면하는 건 안타깝다. 무등산에서 맞은 뜻밖의 춘설은 그런 느낌을 또렷하게 느끼고 누리라는 자연의 깜짝 선물이었으리라. 한 계절의 전성기를 담뿍 누리는 것도 시간이 주는 선물이고 우리가 맛볼 행복이다. 하지만 좀 어설픈 듯해도 두 계절이 서로 만나 포옹한다. 찾아올 계절은 떠날 계절에게 애썼다, 고맙다 인사하고, 떠나는 계절은 제가 시달리게 한 세상을 다른 품으로 도닥여 달라고 당부하며 작별하는 모습을 보는 건 얼마나 멋진 일인가! 그런데도 모든 계절의 복판에서 그 계절만 누리려고 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모자란 생각 같다.

자연의 이치는 그러한데 세상의 인심은 굳이 편을 가르고 면을 쪼개며 선으로 그어가며 내 편, 네 편으로 으르렁거린다. 그래 봐야 그거 말고는 다른 것 맛보지도 누리지도 못하는 것을. 이 계절은 이 맛으로 저 계절은 저 맛으로 두루 누려야 하는 것을. 소쇄원 제월당 뒤란에 수줍게 핀 동백이 이제는 활짝 피었거나 이미 푸른 풀밭에 툭! 떨어져 있을지 모른다. 그 아름다움조차 얼치기 홍위병들 설쳐대는 붉은 깃발에 가려 보지 못할까 두렵다. 두 계절이 만나 소통하는 늦겨울 이른봄의 향취가 새삼 그립다. 매화향 가득 그윽하게 퍼졌을 남도의 봄날에.

김경집 인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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