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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이입의 달인

입력
2014.03.21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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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꾼에게 필요한 재능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감수성의 차이란 종이 한 장에 불과하니, 노력하면 쑥쑥 느는 예술이 바로 이야기라고 답해왔다. 그래도 꼭 하나를 꼽아 달라는 부탁을 다시 받을 땐 '감정이입(感情移入)' 네 글자를 떠올린다.

타인의 감정을 내 것처럼 움직이기란 쉽지 않다. 나는 등장인물인 그와 이름도 나이도 취향도 때론 성별까지 다르다. 이 차이를 뛰어넘어 그처럼 말하고 생각하고 느끼기 위해선 미리 시간과 정성을 쏟아야 한다.

로마 오현제(五賢帝) 중 세 번째 황제 하드리아누스의 목소리로 소설을 완성시킨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는 '창작 노트'에 이렇게 적었다. "한 사람의 사상을 재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의 하나 : 그 사람의 서재를 재구성하는 것" 어찌 서재뿐이랴. 그의 침실, 그의 집무실, 그의 식당, 그의 정원, 그의 여자, 그의 친구, 그의 호적수를 살피는 것이 곧 작가가 하드리아누스로 탈바꿈하는 과정이다. "이 작품을 쓰는 데 있어서의 규칙 : 관계되는 일체의 것을 연구하고 읽고 조사할 것." 사소한 버릇에서부터 광대한 사상까지 파악하고 정리해서 내 것으로 만들 것. 유르스나르의 규칙은 타인의 삶을 문장으로 살아내려는 작가들이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는 규칙이기도 하다.

때때로 우리는 사람이 아닌 생물에 감정을 싣기도 한다. 애완견이나 경주마처럼 인간과 함께 지내는 동물도 있고, 호랑이나 장산곶매처럼 인간에게 곁을 허락하지 않는 동물도 가능하다. 대나무나 느티나무가 되어 바람과 비와 새들을 노래한 이야기 모음도 있다.

은 생물에 대한 감정이입의 새로운 경지를 보여준다. 이 저마다의 표정으로 자리를 잡은 별별 인간들의 모음이듯이, 이 책엔 요충이나 간디스토마처럼 우리 귀에 익숙한 기생충부터 감비아파동편모충이나 참굴큰입흡충처럼 발음하기도 힘든 기생충까지 다양하다. 영화제목을 차용하여 기생충을 가르는 부제도 의미심장하다. '착하거나 나쁘거나 이상하거나'

회충의 일생을 서술한 대목이 눈길을 끌었다. 알을 깨고 나온 유충의 외로움부터 시작한다. "어린 회충에게 도움말을 해줄 엄마 회충은 다른 사람의 뱃속에 있다. 매사를 혼자 힘으로 해결해야 하는 이 상황에서 어린 회충은 의연하게 십이지장에 연결된 혈관에 몸을 싣는다. 수많은 적혈구를 만나고, 자신을 적대시하는 백혈구들을 피해 가면서 회충은 드디어 간에 도달한다." 또한 회충약 보급으로 인해, 암수딴몸인 회충의 독수공방이 증가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다. "어두컴컴한 사람의 몸 안에서 자기 친구는 언제쯤 올까 궁금해 하며 고독을 삼키는 회충"을 주충공(主蟲公)으로 삼은 이야기 한 편이 나올 날도 머지않았다.

한 걸음 더 나아가면 무생물에게도 감정이입이 가능하다. 나도 딱 한 번 무생물의 입장에서 소설을 지은 적이 있다. 내가 닮으려고 노력한 대상은 섬 그것도 독도다. 울릉도와 독도에 얽혀 역사책에 오르내리는 이사부나 안용복보다 섬 자체의 쓸쓸함에 끌려 을 썼다. 이 소설은 독도가 탄생하는 순간부터 현재까지를 훑는다. 해양 생물과 인간들이 등장했다가 사라져도 독도는 홀로 우뚝하다. 백 년 인생이 아니라 250만년이 넘는 도생(島生)의 웅장함을 담는 것이 이 작업의 목표였다.

황제는 물론이고 기생충이나 섬까지 감정이입이 가능하다면, 행성 사이 우주공간을 떠도는 유성체(流星體)에게 마음을 줘도 헛되지 않다. 마침 운석이 우리나라 곳곳에 떨어져 주목받고 있다. 운석이 맞는지 확인하는 과정부터 무게와 금액을 도표로 만들어 가치를 따지는 소식까지 꼼꼼하다. 하지만 내가 궁금한 이야기는 시작되지도 않았다. 운석에게 지구란 행성은 무엇인가. 또 운석은 자신을 발견하고 좋아하는 저 인간이란 생명체를 어찌 받아들일까. 운석의 가치를 이곳까지 이른 우주여행으로 파악하는 모험담을, 를 쓴 안상현 선생님이나 를 번역한 이명현 선생님이 빅 히스토리(Big History)로 들려주면 어떨까. 햇살 한 줌 따듯한 공감이 절실한 이 봄날에!

김탁환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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