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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 백수해안도로 '환상의 풍광', 칠산바다에 바짝 붙어 고불고불 사십여리… 굴비 눈도 휘둥그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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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 백수해안도로 '환상의 풍광', 칠산바다에 바짝 붙어 고불고불 사십여리… 굴비 눈도 휘둥그레

입력
2014.03.19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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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시요?"

미닫이문을 여는 데 여남은 여인들의 눈이, 두 개씩 서른 개 가까운 눈동자의 초점이 한꺼번에 내 얼굴로 달려든다. "워-메. 이걸 어짜쓰가이." 포구 마을 경로당엔 어쩐 일인지 죄 할머니들뿐이고, 그래서 그니들은 적잖이 편안한 품새로 퍼져 누워 있었던 것인데, 생각지 않았던 남자의 방문에 가슴팍을 닫고 치맛단을 끌어내리느라 일순 분주해진다. 옛 얘기나 좀 들어볼까 하고 무심코 경로당 문을 연 것인데 어떻게든 사태를 수습해야 할 처지가 됐다. "저, 저…여기서 소주를 살 수 있다고 들어서요." 한 분이 반가운 말투로 일어선다. "나가 내려놓은 놈이 좀 있네. 우리 집으로 가세." 그리하여 예정에 없던 돈 육만 원을 지출했다. 가양주 반 말. 뒤에 말하겠지만, 그게 이번 여행의 가장 쏠쏠한 수확이었다.

백수해안도로. 이름에서 느껴지는 생래적 친밀감 탓에 한 번 가봐야겠다고 지도에 동그라미를 쳐둔 곳이다. 갔다. 가는 길엔 때아닌 눈이 내려 쌓였는데 도착하니 기온이 20도 가까이 올라 봄꽃조차 늦어 보이는 유별스러운 날씨였다. 전남 영광군 백수읍. 해안도로는 칠산바다에 바짝 붙어 고불고불 사십여 리를 뻗어 있다. 낙조가 아름답기로 손꼽히는 곳이다. 서쪽 면을 모두 투명 유리로 만들어 날마다 다른 빛깔의 노을을 '전시'해 보여주는 노을전시관이 여기 있다. 서해답지 않은 단애 지형으로 탁 트인 풍광이 펼쳐진다. 그래서 사진여행 가이드북 같은 류의 책에 몇 군데의 포인트가 상세한 좌표로 표시돼 있는 곳이다. 과연 그러한 곳인데, 풍경보다 그 양쪽 끝에 붙은 두 마을의 오늘이 사실 궁금했다.

"심심항께 이런 거라도 심고 그라제. 근디 요거슬 캐 묵을라믄 3년은 기다려야 허는디, 나가 그때까지 살아 있을랑가 모르겄소."

엽기적 할매들이 사는 섬에서 벌어지는 좌충우돌을 담은 영화 '마파도'의 배경은 사실 섬이 아니다. 백수해안도로의 남쪽 끝, 백수읍 백암리 1구가 그곳인데 어느 외딴 섬보다 외진 바닷가 시골마을이라고 들었다. 마을 이름은 동백마을이랬다. 해안이 깎아지른 절벽이라 더는 바닷가에 얼씬할 생각을 않으시는 연배의 노인들이 고기가 끓던 칠산바다의 아득한 기억처럼 살고 있다고 했다. 그게 불과 몇 해 전이다. 그런데 가보니 마을의 목 좋은 곳, 그러니까 바다를 향해 탁 트인 자리는 심각하게 귀여운 캐릭터로 장식된 펜션 몇 채가 차지하고 있었다. 마을 가운데 채마밭에서 도라지를 심던 김정임 할머니는 연세가 아흔에 가까웠다.

"나가 미군 진주하던 해 여기로 시집 와서는 여태 살았소. 고기 잡던 양반들 돌아간 뒤론 참말로 쓸쓸했제. 근데 영화 찍고부터섬 사람 홍수가 났었소. 요샌 전보단 조용혀. 근디 사람들은 하나 둘 딴 세상 사람이 되불고, 마을은 영 달라져 부러서 좀 거시기 하요….어떻소? 그래도 바다는 참 좋지라."

동백마을이 백수해안도로의 끝인 줄 알았는데 길은 시멘트 포장으로 더 이어져 있었다. 그 길을 따라 갔더니 마을 하나가 더 있었다. 답동마을. 거기가 진짜 끝이었다. 마을 입구 해변 보리밭엔 싹이 파랗게 돋았고 썰물의 너른 갯벌엔 개막이 그물을 손질하러 들어가는 경운기 소리가 마치 통통배 소리인 듯 가맣게 바다를 향해 멀어지고 있었다. 뻑뻑한 먼지의 층을 뚫고 쏟아지는 봄볕이 그 바다의 얼굴 위에서 자글거렸다. 바람은, 아마도 찼던 듯한데 부쩍 올라버린 기온에 스며 질감이 보드라웠다. 여기도 어김없이 펜션은 있었지만 다행히 우악스럽지는 않았다. 동백마을 김 할머니의 "참 좋지라"는 말이 내겐 이 마을에서 유효할 수 있었다.

동백마을 입구부터 모래미 해수욕장까지 약 9㎞가 백수해안도로의 중심 코스다. 드라이브 코스로 인기 높고 자전거 타기에도 그만인 길인데, 벼랑을 조금 내려서면 데크를 매달아 조성한 산책로가 길게 이어져 있다. 노을전시관부터 돔배섬 앞까지 약 2.3㎞ 이어진 노을길이다. 혹 여기는 동해가 아닐까 싶은 시원시원한 풍경을 맞닥뜨리게 된다. 밀물과 썰물이 겹쳤다 흩어지는 수평의 움직임 대신 새하얀 포말이 수직의 바위에 부딪치는 모습을 금빛 노을 속에서 만날 수 있는 곳. 도로에서 산책로로 내려서는 입구가 여럿이고 입구마다 주차장이 마련돼 있어서 드라이브를 하다가 꽂히는 풍경에서 느긋하게 색다른 노을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갯벌이 짧아 공기도 갯내음 없이 상쾌하다.

북쪽으로 뻗은 해안도로는 모래미 해수욕장을 찍고 다시 남쪽으로 꺾인다. 여기서부터는 또 다른 풍경이다. 도로가 갯벌이 깊숙하게 들어온 해안과 산허리 사이에 낀 길로 변한다. 참, 백수읍의 백수는 친밀감을 줬던 그 백수가 아니라 흰 백(白)자에 봉우리 수(岫)자다. 산의 봉우리가 하얗다는 뜻이 아니라 일백(百)에서 하나(一)를 뺀 아흔아홉 개의 봉우리가 이곳 구수산(351m)에 있다는 뜻. 높지 않은 봉우리들을 이어 아기자기한 등산 코스를 짤 수 있다. 바다와 산, 들을 모두 즐길 수 있는 코스로 등산꾼 사이에선 꽤 인기가 높다. 남쪽으로 내닫는 도로의 끝에 정갈한 분위기의 원불교 영산성지가 있다. 여기서부터 길은 구불구불 다시 북쪽으로 향하는데 그 끝이 법성포다. 종착점은 간다라 양식 불상이 인상적인 법성포 백제불교최초도래지.

쉬엄쉬엄, 백수해안도로를 이리저리 헤집고 돌아다니다 도착한 곳이 글머리에 쓴 법성포 면소재지의 그 경로당이다. 옛날 칠산바다의 넉넉한 소출이 모여들어 고깃배들이 정체를 빚던 마을. 이제 고기가 사라져버린 포구 뱃사람들의 짠한 스토리라도 좀 주워갈 생각이었다. 그랬는데 어쩌다 민망해져서 엉겁결에 이야기를 꺼낸 것이 오래 전 어느 책에서 읽은 법성포 소주 얘기였다. 나름 난처한 상황을 무마하려는 시도였다. '설마 그런 게 아직 있겠어' 하는, 부작위를 의도하는 얕고 재빠른 계산이 가미된. 그런데 그 계산이 바로 깨졌다. 말투도 괄괄한 박순애(79) 할머니 왈.

"배급주(화학주)만 먹던 것들이 이 토종(법성포 소주)을 한번 맛보면 그냥 입이 달라붙어서 이것만 찾는당께. 만드는 법? 뭣 땀시 갈쳐달라고 그란데. 배아 가서 할랑가봐? 닥치고 일단 사 갖고 가서 한번 마셔봐."

법성포 소주는 예부터 독하기로 유명했단다. 밀가루로도 만들고 쌀로도 만든다. 쌀로 빚은 것은 알코올 도수가 60도 정도다. 그래도 "빼갈"로 마시는 게 가장 맛있다고. 이 마을 사람들은 독한 술을 그대로 마시는 것을 '빼갈'이라고 했다. 정확한 내력도 주조법도 기록이 없다. 누룩을 딛는 전통 방식 대신 '약'이라고 부르는 주정을 써서 고두밥을 발효시킨다는 걸로 봐서 일제 강점기 즈음 지금의 주조법이 정착된 듯하다. 소줏고리는 더 이상 없고 개량식 장비를 써서 증류한다는데 그나마 그렇게 하는 집도 이제 겨우 서너 집 남았단다. "이곳은 본디 굴비골인디, 굴비가 재미 없어지면시롱 술들도 안 묵는다"는 게 박 할머니의 말. 40, 50년 전 밀주 단속에 걸려서 그때 돈으로 30만원씩 벌금을 물면서도 몰래 만들던 때를 생각하자면 이제 몇 해 안 가 없어질 것 같다고 안타까워했다. 좀 순하게 만들면 더 잘 팔리지 않겠냐고 괜한 훈수를 뒀다가 욕 한 마디를 더 들어야 했다.

"써글 것이! 모르믄 잠자코 있어부러. 그럼 그게 술이 된댜? 독해야 뱀을 담가도 (손으로 코브라 모양을 만들며) 요로코롬 뱀이 서 있지. 여 영광에선 물 타고 그란 것은 술이라고 안 만들어 팔아. 우리가 얼매나 짱짱한 사람들인디."

[여행수첩]

●서해안고속도로 영광IC가 가깝다. 자전거 투어를 생각한다면 법성포에서 출발해 동백마을까지 갔다 돌아오는 코스가 일반적이다. 왕복 44㎞ 정도로 4, 5시간 소요. 마을을 벗어난 백수해안도로 구간은 노을전시관(061-350-5600)과 칠산전망대에 편의시설이 있다. 노을전시관 맞은편에 광천수를 쓰는 영광 해수온천랜드(061-353-9988)가 있다. ●칠산바다에선 더 이상 조기가 잡히지 않지만 법성포엔 공해에서 잡아온 조기로 굴비를 만드는 덕장이 여전히 있다. 굴비를 이용한 다양한 요리를 싸게 맛볼 수 있다. 법성포에는 간다라 양식의 불교 문화를 접할 수 있는 백제불교최초도래지가 있다. 영광군 관광안내소 (061)350-5769

유상호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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