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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막한 콘크리트 건물이지만, 나에겐 추억이 깃든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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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막한 콘크리트 건물이지만, 나에겐 추억이 깃든 고향"

입력
2014.03.19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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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이 그리울 때 언제나 펼쳐 볼 수 있는 추억의 지도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남들에겐 삭막한 콘크리트 건물이지만 저에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고향이죠."

19일 서울 서대문구 서울역사박물관 내 전시실. 이곳에서 열리고 있는 기획전시 '아파트 인생'에서 유독 발길이 오래 머무는 공간이 있다. 바로 시민 큐레이터 이인규(32)씨가 직접 제작한 지도가 걸린 '아파트 내인생' 코너다. 아파트에 얽힌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풀어낸 전시에 이씨는 7m 길이 벽면 공간을 할당 받아 고향인 '둔촌주공아파트' 단지를 기록한 거대한 지도를 만들어 출품했다. 지도 안에는 커다란 단지의 산책로와 놀이터, 공터, 주차장, 습지와 언덕 등이 상세하게 표시돼 있고 장소마다 옛 사진들이 붙어 있다.

이씨는 "오랜 세월 이곳에서 보낸 주민들에게 추억이 담긴 사진을 모았더니 그 자체로 지도가 됐다"면서 "주민들은 특별한 장소가 아닌 주차장, 공터 등 단지 곳곳에 존재하는 평범한 장소들을 각자의 풍경으로 기억하고 있더라"며 웃었다.

이씨가 이번 전시에 큐레이터로 참여한 건 지난해 5월 발품을 팔아 펴낸 독립 잡지 가 계기였다. 이씨가 유년기와 청년기를 보낸 둔촌 주공 아파트에 얽힌 이야기와 사진 등을 담아 펴낸 잡지를 전시 기획자가 우연히 보고 제안을 해온 것이다. 그는 "아파트는 이미 보편적인 주거공간으로 자리 잡았고 이에 대한 학문적 논의도 많이 진행됐지만 그곳에 살고 있는 주민의 목소리는 거의 없었다"며 "밖에서 보는 아파트가 아니라 그 속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입을 통해 아파트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전시의 주인공인 둔촌주공아파트는 서울 강동구 둔촌1동에 있는 대단지 아파트다. 59만4,000㎡ 넓이에 세대수가 5,930가구에 이른다. 1979년 첫 입주를 시작해 올해 35년째를 맞은 이 아파트는 다른 노후 아파트와 마찬가지로 재건축 승인을 받고 철거를 기다라고 있다. 태어난 이듬해인 1983년 이 아파트에 입주해 초등, 중학교 시절을 보낸 이씨는 요즘 스스로를 실향민이라고 칭한다. 그는 "정 없고 삭막한 공간이라고 폄하되는 아파트지만 나에겐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을 보낸 고향"이라면서 "한번에 3만 명이 넘는 이들이 살고 있으니 잠깐이라도 이곳을 거쳐간 이들을 포함해 수십만 명이 영영 고향을 잃게 되는 것"이라며 아쉬워했다.

평범한 직장인인 이씨가 잡지 제작자로, 큐레이터로 변신을 거듭하는 것도 바로 그런 연유에서다. 지금까지의 작업에 대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릴 고향에 대한 마지막 배웅"이라고 정의한 그는 다음달 3호를 앞두고 있다. "재건축을 피할 수는 없겠지만 같은 공간을 공유했던 사람들에게 잡지와 전시가 잠시나마 위안은 줄 수 있겠죠. 마지막 철거 순간까지 고향의 풍경을 기록할 겁니다."

손효숙기자 sh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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