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격한 신분사회였던 조선시대에는 노비와 백정, 무당, 기생, 광대, 승려, 상여꾼, 공장(工匠) 등 여덟 가지 천민이 있었다. 이들 팔천(八賤) 가운데 가장 멸시를 받은 천민은 백정이었다. 백정은 동네에서 멀리 떨어져 그들끼리만 모여 살아야 했고, 다른 계급과 혼인은 물론 대화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클로드 샤를 달레 프랑스 신부가 한국 가톨릭 잔혹사를 증언한 (1874)에는 정조 때 충청도 홍주(지금의 충남 홍성) 출신 백정 황일광(1757~1802) 이야기가 나온다. 황일광은 양반들도 '천 것'인 자신을 사람 대접 해주는 천주교 공동체에서 구원의 빛을 보았을 것이다. 그는 수시로 "내가 천한 신분인데도 사람들이 너무나 점잖게 대해주니 이 세상에 하나, 또 후세에 하나, 이렇게 천당이 두 개가 있다"고 주위 사람들에 말했다고 한다. 짐승 취급 받던 백정이 양반들과 어울려 천주학을 논하고 애덕을 펴던 그곳이 그에게는 현세의 천당이었다. 결국 황일광은 1801년 신유박해 때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배교하지 않고 순순히 망나니의 칼을 받았다.
백정 황일광 시몬이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가톨릭 교회에서 성인 다음으로 공경하는 인물인 복자(福者)에 오르게 된다. 이번에 시복(諡福)되는 124위는 양반이 60명으로 가장 많고 중인 33명, 천민 4명, 신분미상 27명이다. 1784년부터 자생적으로 뿌리 내린 한국 천주교의 순교자가 2만명이 넘지만 이름이 밝혀진 사람은 수백 명에 불과하다. 무명의 순교자들은 대부분 천민이나 무지렁이 평민이었을 것이다. 천민들이 이름을 갖지 못한데다, 천주학쟁이들을 문초한 관리들이 양반 외에는 거의 기록에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달레 신부가 기록한 순교자들의 면면을 살펴보면서 그들이 목숨으로 지키려 했던 것이 오롯이 종교적 신념 때문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부정부패와 사색당쟁으로 쇠락해가던 조선 후기의 민초들에게 서학(西學)은 새 세상을 열 수 있다는 구원의 빛 아니었을까. 이름도 없이 스러져 간 순교자들은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할 것 없이 모두 하나"(신약성서 갈라티아서 3장 28절)라는 사도 바오로의 말에서 구원의 빛을 보았으리라. 이는 공자가 꿈꾸었던 '대동사회(大同社會)'와 다름이 아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순교자들이 갈구했던 새로운 사회는 아직도 은마처럼 오지 않은 듯하다. 눈에 보이는 신분차별은 사라졌지만, 더 냉혹한 신계급사회가 뿌리 내리고 있다. 극심한 양극화는 계층간 갈등과 분열에다 이념, 세대간 반목까지 키우고 있는 실정이다. 최근 서울 송파구 세 모녀 자살과 동두천 모자 자살 사건 등은 안타까움을 넘어 우리를 슬프게 했다.
종교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가 소외되고 고통받는 이웃의 눈물을 닦아 주는 것이다. 그런데 가톨릭뿐만 아니라 우리의 종교는 백정 황일광이 감격해 마지 않았던 현세의 천당을 만드는 데 소홀하지 않았다고 감히 고백할 수 있을까. 로널드 드워킨은 에서 "종교란 인간 개인의 삶을 초월적이고 객관적인 가치와 연결함으로써 좀 더 심오한 존재론적 질문에 답하려는 시도"라고 정의했다. 무신론자인 그가 말하는 종교란 우리 삶의 의미와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해 다양한 해답을 내놓는 일련의 과정인 셈이다. 유신론자 중에서도 반론을 제기할 사람은 별로 없을 듯하다. 소외되고 고통 받는 이웃에 눈과 귀를 막고 신에게만 매달리는 것은 우상숭배에 불과하다. 인간에 대한 사랑과 이해, 그리고 자비가 없다면 그것은 허울뿐인 종교임에 분명하다.
때 마침 8월 한국을 찾는 프란치스코 교황도 "가난과 맞서 싸우라. 불평등에 무감각한 사회에는 결코 평화와 행복이 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불평등에 눈 감지 않으면서 종교의 역할을 다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540만 신자를 자랑하는 한국 가톨릭 교회가 위태로운 줄타기를 어떻게 이어나갈지 주목되는 이유다.
권대익 문화부장 대우 dkw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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