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일본측에 한일 정상회담의 전제 조건 세 가지를 제시함에 따라 양국간 힘겨루기가 본격화할 것으로 보인다. 우리측이 일본의 '진정성 있는 태도변화'를 촉구하던 모호한 화법에서 벗어나 고노 담화 계승과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야스쿠니(靖國) 신사 참배 중단,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차관급 협의체 가동 등 구체적 의제를 협의 테이블에 올려놓은 만큼 각 사안의 진전 여부에 따라 한일관계가 요동칠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 고노 담화 부분은 이미 정리가 된 상태다. 일본 정부가 검증작업을 계속하고 있어 불씨가 여전하지만 아베 총리가 직접 고노 담화 계승 의사를 밝힌 점은 의미가 적지 않다. 박근혜 대통령이 이 부분을 평가하면서 긍정적 반응을 내놓은 것도 그 때문이다. 여기에는 다음달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아시아 순방을 앞두고 한일 양국이 아무런 공감대 없이 마냥 등을 돌릴 수는 없다는 현실적 필요성도 반영됐다.
하지만 고노 담화 계승은 한일 정상회담을 위한 필요조건에 불과하다. 우리 정부가 나머지 두 가지 조건을 일본측에 추가로 제시한 것은 그 때문이다. 아베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 참배로 더 이상 주변국을 자극하지 않고, 일본 정부가 위안부 문제에도 가시적인 조치를 내놔야만 적극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줄곧 강조해온 '생산적 대화'도 같은 맥락이다.
외교 소식통은 17일 "일본이 고노 담화 승계를 내놓고 한국이 정상회담 가능성을 열어 놓으면서, 두 나라가 각자 첫 수를 주고 받은 셈"이라며 "다음 단계의 물꼬가 어디에서 트이느냐가 관건"이라고 말했다.
다만 전망은 그리 밝지 않다. 아베 총리 스스로 "야스쿠니 참배는 개인적 신념에 따른 것"이라고 밝힌 만큼, 중단 선언은 정치적 자살행위에 가깝다. 일본은 2011년 위안부 문제를 협의하자는 우리 측의 두 차례 제안에 대해 아직 묵묵부답이다.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우리 대법원의 배상판결이 임박한 상황에서 일본이 위안부 문제에까지 성의를 보일지 의문이다.
한일 양측이 고노 담화를 통해 한발씩 내디뎠지만 한발 더 앞으로 나가기는 쉽지 않은 상태다. 따라서 이달 말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핵안보정상회의를 계기로 거론되는 한미일 3국 정상회담도 현재로서는 불투명하다. 정부 관계자는 "박 대통령 일정에 핵안보회의 참석 외에 오바마 대통령이나 아베 총리와의 만남이 포함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한미일 정상이 헤이그에서 과거사 문제가 아닌 안보협력을 주제로 자리를 함께 할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있다. 한일간 현안은 뒤로 빼고 구체적 협의보다는 상징적인 장면을 연출해 한미일 3각 협력체제를 복원하는데 그치는 방식이다. 다른 소식통은 "일본 정부가 아베 총리의 핵안보회의 참석을 아직 공식 발표하지 않은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며 "한일 양국에서 깜짝 발표가 나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김광수기자 rolling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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