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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재 칼럼/3월 18일] 꾸짖는 대통령 번지수가 틀렸다

입력
2014.03.17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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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노무현 전 대통령만큼 말로 곤욕을 치른 대통령은 없었다. 변호사답게 그는 달변이었다. 말에 거침이 없었고 언변은 화려했다. 자신감이 지나쳤던 걸까. 즉흥적인 연설이 늘었고 날 선 말이 많아졌다. "이쯤 되면 막가자는 거죠?" "대통령 못해먹겠다는 생각이 든다." "토론하고 싶은데 그 놈의 헌법이…" "남북대화 하나만 성공시키면 다 깽판쳐도 괜찮다." 임기가 끝날 때쯤 그는 측근에게 토로했다. "고쳐보려고 해도 잘 안 된다. 자리와 듣는 사람들의 분위기가 좋을 수록 사고가 자주 났다."

박근혜 대통령은 눌변에 가깝다. 단문단답형이다. 강하면서도 내향적인 성격상 이유에다 어려서부터 정제된 언어구사 교육을 받은 때문으로 보인다. 의원 시절에는 촌철살인의 돌직구로 유명세를 탔다. "대전은요?" "참 나쁜 대통령." "나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 쉽고 단순한 말로 상황을 압축하는 특유의 어법을 구사했다. 취임 후에는 비유나 은유를 적절히 활용했다. '손톱 밑 가시' '신발 속 돌멩이'등의 표현은 감성적이면서도 메시지가 분명했다.

집권 2년 차 들어 박 대통령의 화법이 확 달라졌다. 격조가 떨어지고 거칠어졌다. '통일 대박'은 대박을 치기는 했으나 경솔하고 가볍다고 느낄 만한 표현이었다. 대박 발언이 흥행을 거둬서일까. 발언의 수위가 점점 높아졌다. "진돗개가 한번 물면 살점이 완전히 뜯겨져 나갈 때까지 안 놓는다(2월5일)." "천추의 한을 남기면 안 된다(2월25일)." "불타는 애국심을 가지고 비장한 각오로(3월12일)" 등이다. 압권은 지난 10일 수석비서관회의에서였다. "쓸데없는 규제는 우리가 쳐부술 원수, 제거하지 않으면 우리 몸을 자꾸 죽여가는 암 덩어리"라는 말을 쏟았다. 처음에는 규제를 '우리의 원수'라고 했다가 다시 한번 강조하면서 '쳐부술 원수'로 한층 세졌다. 규제개혁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지만 지나치게 살벌하고 섬뜩한 표현이다.

정치권에서는 박 대통령의 발언이 거세지는 이유를 절박한 심정의 표출로 해석한다. 해결해야 할 과제는 산적해있는데 좀처럼 성과가 나타나지 않데 대한 조바심이 강한 표현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요즘 규제 완화에 사활을 걸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규제 개혁만 되면 금방 경제가 살아나고 일자리가 창출될 것처럼 믿는 것은 인식이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 모든 규제가 암 덩어리나 원수는 아니다. 나쁜 규제는 없애야겠지만 재벌의 횡포를 막고 부의 집중을 견제하는 좋은 규제는 지키고 더욱 강화해야 한다. 마치 군사작전 하듯 밀어붙일 사안은 아니다. 그린벨트나 재건축 규제완화로 덕 볼 계층은 서민보다는 땅부자, 건물부자다. 어제로 예정됐던 규제개혁 장관회의가 며칠 늦어진 것도 좋은 규제가 더 많이 사라질 조짐인 것 같아 슬그머니 걱정된다.

정작 박 대통령이 '쳐부술' 암 덩어리는 국가정보원이다. 현 정부 출범 이후 정국은 국정원 문제에서 한 발짝도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지난 1년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으로 허송세월 하다시피 하더니 올해는 벽두부터 국정원 간첩 증거조작 의혹으로 발목이 잡혀있다. 그 책임의 상당 부분은 박 대통령 자신에게 있다. 국정원이 번번이 국정운영의 동력을 갉아먹고 부담만 지우고 있는데도 질책은커녕 감싸온 게 박 대통령 아닌가. '비정상적 관행의 정상화'를 국정과제로 내세웠지만 정작 국가최고정보기관의 비정상적 행태에는 눈을 감아왔다.

박 대통령이 진정 공직사회에 긴장을 불어넣고 싶다면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줘야 한다. 지도자의 말은 때론 과격해질 필요도 있지만 반복되면 효과는 떨어지고 피로감만 높아질 뿐이다. 공자는 지도자를 "말은 신중하지만 행동에서 민첩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당장 남재준 국정원장을 해임하고 국정원을 뿌리부터 뜯어고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무능한 장관들을 갈아치우고 관료조직에 활력을 불러 일으켜야 한다.

덧붙이자면 등골이 오싹한 말을 듣는 국민들도 덩달아 꾸지람을 듣는 듯해 마음이 편치 않다는 것을 알았으면 한다.

이충재 논설위원 cj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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