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일 오전 8시 우크라이나 남부 크림자치공화국에서 1,205개 투표소가 일제히 문을 열었다. 불과 두 주 전 느닷없이 결정된 주민투표다. '러시아 연방의 구성원으로 러시아에 편입되는 것을 지지하는가' '크림반도가 우크라이나의 일부로서 지위를 갖는 것과 크림자치공화국의 '1992년 헌법' 회복을 지지하는가'. 두 가지 선택지 중 하나에 '찬성한다'고 표시를 해야 한다. 반대를 위한 칸은 없다.
크림반도의 운명을 자주적으로 결정한다는 의미에서 이 투표에 얼른 위화감이 들지 않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에서 부패 정치인으로 낙인 찍힌 빅토르 야누코비치 전 대통령이 시위대의 위세에 눌려 조국을 등진 뒤 한 달도 안 돼 이 지역은 최대 3만5,000명의 러시아군인이 장악해 버렸다. 우크라이나 정권이 친러시아파에서 친서구파로 뒤집어지자 흑해함대 등 자신의 군사ㆍ경제 이권을 잃지 않기 위한 러시아의 노골적인 주변국 군사개입이었다.
우크라이나 반정부 시위 사태는 크림반도를 도화선으로 국제분쟁으로 비화하고 있다. 러시아의 군사개입에 맞서 미국과 유럽 주요국들이 발동한 경제제재는 아직까지는 낮은 수준이다. 하지만 이날 투표 결과가 공개되고 크림자치공화국 정부가 러시아 편입을 위한 절차를 진행하고 이에 맞장구 쳐서 러시아가 크림을 받아들이면 제재의 강도는 성큼 높아질 수 있다.
서구는 17일부터 러시아 군인·고위공무원의 방문 금지와 은행 자산동결 등이 포함된 제재에 들어갈 태세다. 러시아 은행을 비롯한 여러 분야에 대해 경제적 불이익을 추가로 부과하는 동시에 소치 주요 8개국(G8) 정상회담 취소 등도 언급한다. 1989년 조지 부시와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냉전 종결 선언 이후 실로 사반세기만에 세계는 다시 냉전의 초입에 들어서게 될지도 모른다.
우크라이나 사태는 국제법이란 얼마나 권위 있는 것인지, 아니 도대체 쓸모 있기나 한 것인지를 다시 묻는 시험대가 될 수도 있다.
개표가 마무리 되면 크림 자치공화국 의회 의장은 이달 안에 러시아 편입 절차를 모두 마무리하겠다고 언급했다. 러시아 하원도 21일 크림 병합 문제를 본격 논의한다. 러시아는 1982년 포틀랜드가 주민투표로 영국 귀속을 원한 것을 받아들여 영국이 영유권을 주장한 사례를 거론한다. 우크라이나 정부와 미국, 유럽은 투표 자체가 우크라이나 헌법에 위배된다고 주장한다. 영토 문제는 우크라이나 국민투표로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 영국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독립과 주권, 현존하는 국경을 존중할 것을 재확인한 1994년 부다페스트 각서도 언급하고 있다.
크림 투표를 앞두고 막판까지 진행된 외교 노력은 모두 실패했다. 미국과 러시아는 평행선을 달렸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15일 크림 주민투표 효력을 무효화하려는 결의안을 표결했으나 러시아의 거부권 행사로 무산됐다. 하지만 그래도 해법은 외교적 노력뿐이다.
김현우기자 777hyunwo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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