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강에 '산업의 쌀'이란 별칭이 붙은 건, 모든 산업에 들어가는 필수 재료이기 때문. 자동차도, 선박도, 가전제품도, 아파트도 철강 없이는 만들 수 없다.
국내 철강시장을 수십 년간 지배해왔던 포스코(옛 포항제철)는 수십 년 간 국내 주요업계의 '슈퍼 갑'으로 불렸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철강재가 부족했던 시절 모든 제조업체들은 포스코에만 매달렸고, 포스코가 부르는 게 곧 값이었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포스코 눈 밖에라도 나면 철강재를 받을 수 없었다. 포스코 마케팅팀 대리가 가장 무서운 존재라는 말까지 있었을 정도"라고 말했다.
하지만 포스코 사람들은 요즘 이런 얘기가 나오면 한결같이 "세상이 바뀐 지 오래"라고 말한다. 한 관계자는 "갑을 관계는 이미 역전됐고 적어도 주요 업체들에 대해선 우리가 '슈퍼 을'"이라고 말했다.
최근 현대제철은 현대자동차에 공급하는 자동차 강판가격을 ▦3~4월엔 톤 당 8만원 ▦5~7월엔 9만원씩 내리기로 했다. 현대차가 원가절감을 위해 공급가격 인하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회사 관계자는 "신일본제철이 최근 한국지엠에 공급하는 강판 값을 낮추자 현대차도 비슷한 수준에 맞춰달라는 요구를 해왔다. 중국업체 등 경쟁업체가 많아 수익이 줄더라도 맞춰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일각에선 "현대제철과 현대차는 형제회사이니까 형(자동차)을 아우(제철)가 도와준 것 아니냐"는 분석을 내놓지만, 업계의 한 관계자는 "형제 여부를 떠나 현재 수급구조 상 현대차 같은 대형 구매선이 공급가격 인하를 요구하면 따라갈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현대제철이 낮춘 만큼 포스코도 낮출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포스코는 이미 조선업체들로부터 선박용 후판가격 인하 '압박'을 거세게 받고 있다. 현대중공업 대우조선해양 삼성중공업 등 '빅3'는 포스코에 대해 톤당 4만~5만원 정도는 내려줄 것을 강하게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포스코 관계자는 "품질이나 안정적 공급 등 비가격적 요소를 강조해 조선사들을 설득하고 있지만 협상이 쉽지 않다"며 "더 이상 우리는 갑이 아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그나마 비교 우위를 가진 포스코가 이럴 정도면 동국제강이나 다른 철강사들은 말할 것도 없다"고 전했다. 현재 조선용 후판 납품가격은 2008년 호황기 대비 절반수준으로 추락한 상태다.
철강사들을 '절대 갑'의 지위에서 끌어내린 건 글로벌 공급과잉이다. 국내에서도 현대제철의 고로생산으로 공급량이 크게 늘었지만, 무엇보다 중국업체들의 공세가 철강시장을 '공급자 시장'에서 '수요자 시장'으로 바꿔놓았다는 평가다.
지난 2000년 1억3,800만톤 수준이던 중국의 철강생산량은 2010년 이후 6억8,000만 톤으로 무려 5배나 급증했다. 여기에 한국, 일본 등 철강 강국들도 증산 대열에 합류하며 동아시아 철강시장은 2008년부터 공급과잉이 됐다. 제조업체들로선 포스코가 아니라도, 국내는 물론 일본 중국 등에서 얼마든지 철강을 구할 수 있는 터라 갑을관계의 역전은 불가피했다는 분석이다.
전문가들은 갑을의 재역전, 그리고 나아가 포스코의 슈퍼갑 지위복귀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신임 권오준 포스코 회장이 '철강 본원경쟁력 강화'를 제1과제로 언급한 것도, 이 같은 위기 의식의 표현으로 해석되고 있다.
공문기 포스코경영연구소 연구원은 "당분간 공급과잉이 해소되기 어려운 데다 전방산업의 빠른 회복이 쉽지 않을 것"이라며 "현실적으로 고부가가치 제품으로 중국산과 차별화를 꾀하고 중국산 불공정 제품 유입을 막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김현수기자 ddacku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