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늙으면 자연스레 옛날이야기를 많이 한다. 나도 몇 년 후엔 지하철 무료승차하는 특권을 누리게 되니 옛날이야기를 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본다. 필자가 대학교 다닐 때 학교 다음으로 많이 간 곳은 단연 당구장, 그다음으론 요즘 커피숍이라고 불리는 다방, 세 번째는 그 당시 제대로 된 시설을 갖춘 국내 유일의 야구장인 동대문야구장이었다. 이곳에서 지금은 없어졌거나 이름이 바뀐 제일은행, 상업은행, 농협 등, 은행들이 주축이 된 실업야구 페넌트 레이스가 열렸다. 또 틈틈이 고교야구와 1년에 한 차례 한일전이 열려 우리를 열광시켰다. 여름철에 뜨겁게 달아오른 콘크리트 바닥에 앉아 야구경기를 보려면 엉덩이가 익을 정도로 달아올라서 내야석, 외야석을 가리지 않고 그늘을 찾아 자리를 옮겨 다녀야 했다. 그리고 세상에! 첫 야간경기 조명탑이 세워진 후 깜깜한 밤하늘을 솟아오르는 야구공이 그리는 궤적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우리도 언젠가는 야구공이 아니라 우주선을 쏘아 올릴 거야. 우리는 그렇게 무더운 여름을 야구장에서 보내곤 했다.
야구장은 허물어졌고 그곳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축가가 설계한 동대문디자인플라자&파크(DDP) 건물이 들어섰다. 은빛 거대한 원형에다 창문도 찾아보기 어려운 차가운 알루미늄 외벽 탓에 붙여진 '외계에서 온 행성'. 패션타운과 전통시장, 그리고 말 그대로 동대문 등 주변 환경과 사뭇 다른 분위기이기에 '불시착한 UFO'등, 다양한 의견을 쏟아내고 있는 DDP. 그 내부는 도대체 어떻게 생겼을까 궁금하던 차에 마침 그곳 전시관 한쪽 구석에 전시물 제작을 하게 돼 일반 관람객보다 조금 먼저 건물 안에 들어갈 기회가 생겼다.
지상 4층 건물이라지만 실은 내부에선 층 개념도 명확하지 않을뿐더러 내벽 주위를 돌면서 이동하다 보면 오르막인지, 내리막인지도 헷갈리고 수평 개념조차 확실치 않은 대단히 독특한 건물임은 틀림없다. 아마도 정말 UFO가 있다면 그 내부가 이런 느낌이리라.
고대 로마 시대 엔지니어이자 건축가였던 비트루비우스는 건축에 대해 유명한 말을 남겼다. "건물은 견고하고, 아름다우며, 목적에 맞게 기능에 충실해야 한다." 건축의 본질에 관해 그 이상 단순하고 명쾌하게 설파한 말이 있으랴. 이 말을 되씹어 보면, 견고함은 기술적인 문제고, 아름다움은 예술적인 문제다. 반면 건물의 목적과 기능은 실용성의 문제다. 그런데 이 단순 명료한 세 가지 조건을 모두 만족하기는 쉽지 않을뿐더러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데 건축가들의 딜레마가 있다. 대도시에 세워진 유명 건축물들은 한결같이 이 세 가지 기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오래전 파리의 에펠탑과 퐁피두센터가 그랬고,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뉴욕 무역센터를 거쳐 아직 세워지지도 않은 도쿄 올림픽 주 경기장도 그렇다.
DDP가 5년 넘는 공사를 마치고 21일 일반인들에게 문을 연다. 개관을 앞두고 건물에 찬사와 비난이 동시에 쏟아지고 있다. 필자도 맘만 먹으면 100가지 의견 (대부분 부정적인 의견)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비트루비우스로 돌아가 보자. 건물은 견고하고 아름다워야 한다고 했다. 건물은 이미 완성되었으니 이 두 문제에 대해 더 이상 왈가왈부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다른 장소로 옮길 수도 없고 쉽사리 변경할 수도 없지 않은가 말이다. 게다가 그 건축가와 그 설계와 그 시공사를 선택한 것은 우리들 -실제로는 우리가 권리를 위탁한 정치인과 공무원과 위원회- 이었다. 문제는 비트루비우스의 세 번째, 즉, 목적과 기능성이다. 이건 앞으로의 문제다. 시민 대부분은 이 건물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지 잘 알지 못한다. 서울시 홈페이지에 의하면 '디자인 창조산업의 발신지' 역할을 할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이곳에 가서 우리 국민의 창의성, 파격적이면서도 품위있는 디자인, 이것이 만드는 가치와 미래상을 보고 체험하고 느낄 수 있으면 된다. 그렇게 된다면 '불시착한 UFO'처럼 보이던 건물이 저절로 지금이라도 공중을 날아오를 것 같은 멋진 우주선으로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원광연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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