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도쿄 근교 하코네에 다녀왔다. 등산철도가 산비탈을 오르는 동안 안내방송은 연신 가파른 철길을 자랑했다. 국내에서 택시나 트럭 운전기사들이 ‘경사가 심한 오르막’을 가리키는 데 쓰는 ‘고바이(勾配)’란 말을 여러 번 들었다. 일본어로는 ‘기울거나 가파른 정도’를 가리키고, 우리말의 기울기나 물매와 같다. “눈 쌓인 고바이를 오르느라 진땀을 뺐다”는 말은 잘못이다. 멀쩡한 우리말을 두고 일본어를, 그것도 엉뚱하게 갖다 쓸 이유가 없다.
▦ 아이들 입에까지 파고 든 ‘돈까스’라는 말은 더욱 답답하다. 외국어를 잘라내어 잇거나 한자와 붙여쓰기를 즐기는 일본에서‘포크 커틀릿(Pork Cutlet)’이 ‘돈(豚)카트(Cut)’로 바뀐 것은 이상할 게 없다. 문제는 그 일본식 표기인 ‘돈카쓰(豚カツ)’를 한글로 잘못 옮기면서 시작됐다. 가나(假名)의 ‘쓰(つㆍツ)’는 영어로는 ‘츠(Tsu)’로 쓰고, 소리 값도 비슷하다. 그런데 ‘트(Tu)’를 나타낼 글자가 없다 보니 똑 같이 ‘쓰(つㆍツ)’로 쓴다.
▦ 일본 고유어라면 몰라도 서양어의 번역어라면 우리말로 거듭 옮길 때는 원형을 가려야 했다. 그런데 어설픈 일본어 지식과 틀에 박힌 외래어 표기법에 무심코 따른 결과 ‘포크 커틀릿’이 ‘돈카트’도 아닌 ‘돈카쓰’로, 다시 원인 모를 음운변화를 겪어 ‘돈까스’라는 해괴한 말로 바뀌었다. 저민 돼지고기에 빵 가루를 묻혀 가스 불로 튀긴 요리라고 좋게 풀이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혼란은 ‘쓰(つㆍツ)’를 ‘츠’로 옮긴 책이 늘어나면서 더욱 심하다.
▦ 현재 국내에서 통용되는 뜻으로라면, 단수형‘콘텐트(Content)’가 복수형 ‘콘텐츠’보다 더 어울린다. 이미 널리 사용되고 있는 말을 트집잡아 고칠 필요까지는 없다는 주장은 귀를 기울일 만하다. 다만 이 말이 외국어 의 직수입이 아니라 일본을 통한 우회수입의 결과라면 얘기가 다르다. 콘텐트의 일본식 표기는 ‘콘텐쓰(コンテンツ)’다. 소리는 어색해도 나름 정확한 표기다. 이를 ‘콘텐츠(Contents)’라고 오해하고, 그대로 한글로 옮겼다면 어째야 하나.
/황영식 논설실장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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