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의 크림반도를 장악한지 보름이 지났다. 현재로선 이런 비정상적 상황이 언제까지 계속될 지 예측하기 힘들다. 국제사회의 외교적 노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사태의 또 다른 축인 미국과 러시아가 서로의 굴복만을 강요하는 형국이어서 냉전 종식 후 처음으로 미-러 군사충돌을 우려하는 시각도 있다.
러시아군의 크림반도 진주는 어느 모로 보나 불법이고 침략행위다. 우크라이나 정부가 러시아 대신 유럽과의 협력을 모색하든, 우크라이나 국민이 친 러시아 정부를 무너뜨린 게 혁명이든 쿠데타든 러시아가 관여할 게 아니다. 크림반도의 다수를 차지하는 러시아계의 보호를 위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우크라이나 국민이 러시아계를 해치려 했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이런 예는 과거에도 있었다. 6년 전 러시아는 친 서방 정책을 펴는 조지아가 러시아계 주민을 위협한다는 것을 구실로 침공, 러시아계가 다수인 남오세티야와 압하지야 자치주를 분리독립시켰다. 소련 붕괴 후 러시아가 군사개입해 분리독립을 부추긴 것은 몰도바와 아제르바이잔에서 각각 독립한 트란스니스트리아, 나고르노-카라바흐를 포함해 이번이 다섯 번째다.
크림반도의 자치권을 확대하는 선에서 사태를 봉합하려던 외교노력은 사실상 물 건너갔다. 크림 자치의회의 독립결의안 채택과 통과가 확실시되는 분리독립 주민투표(16일) 강행에 미국은 경제제재와 군사압박 카드를 모두 꺼내 들었다. 그러나 공허하다. 유럽도 경제제재에 동참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나 행동은 없는 지리멸렬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분리독립을 위한 주민투표가 적법하냐는 국제법적 논란 역시 우왕좌왕이다. 1999년 코소보가 세르비아에서 독립할 때 이를 적극 주도했던 미국이 이번 크림 독립에는 반대하고, 당시 코소보의 독립에 완강히 반대했던 러시아는 코소보 사례를 크림반도 독립의 근거로 내세우고 있다. 우크라이나 입장에선 1994년 영토ㆍ주권을 보장받는 조건으로 핵무기 포기를 합의한 유엔 5개 상임이사국과의 '부다페스트 양해각서'가 휴지조각이 된데 허망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차라리 그 때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았다면 이런 꼴을 당하진 않았으리라는 탄식이 나올 만하다.
1935년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가 에티오피아를 침공하자 국제연맹은 이를 강하게 비난하면서 경제제재를 결의했다. 그러나 결의만 했을 뿐 누구도 이탈리아를 응징하려 하지 않았다. 당시 상임이사국이었던 이탈리아를 비롯, 독일 일본 스페인 등은 줄줄이 국제연맹에서 탈퇴했다. 무솔리니는 "참새들이 짹짹거릴 때는 아주 잘하지만 독수리들이 이탈할 때는 전혀 쓸모 없는 게 국제연맹"이라고 비아냥댔다.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공은 결국 2차대전으로 비화했고, 1차대전의 참담한 교훈에서 탄생한 국제연맹은 또 다시 전쟁 책임의 원죄를 안고 사라졌다. 국제연맹이 왜 그렇게 무기력했는지는 여러 원인이 있지만, 그 중 하나가 상임이사회의 만장일치 의사결정 방식이다. 15개국의 상임이사회가 만장일치를 채택한 것은 다른 회원국, 특히 강대국에 대한 간섭과 그에 따른 부담을 피해보려는 의도가 강했다. 모든 이사국들의 의사를 존중한다는 취지지만, 실은 행동을 막는 거부권을 모든 이사국들에게 준 셈이다. 국제연맹의 후신인 유엔이 지금 안전보장이사회 개혁을 추진하고 있으나 거부권을 건드리지 않는 한 개혁 방식이 상임이사국 확대든, 거부권 없는 비상임이사국의 확대든 국제사회의 구심체 역할을 해낼 수 있을 지 의심스럽다.
세계적인 위기컨설팅 업체인 유라시아 그룹의 회장인 이언 브레머 컬럼비아대 교수는 저서 에서 지금을 리더십이 없는 'G제로' 시대라고 규정했다. G7은 부자나라들의 사교모임으로 전락했고, G20은 아직 주류로 나서기는 역부족이라는 것이다. 전후 처음인 이런 상황이 앞으로 10년은 계속될 것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안팎의 많은 도전에 직면한 미국의 리더십이 어떻게 전개될 지 알 수 없지만 우크라이나 사태에서 'G제로'의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
황유석 논설위원 aquarius@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