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나는 오전 7시 반 정도 기상한다. 눈을 뜨면 아내는 출근을 준비하느라 분주하다. 나는 손등으로 침을 닦고 자는 아이의 입언저리에 흘러있는 침을 닦아 준다. 아이와 나는 침을 흘리고 자나 보다. 아내는 자면서 침을 흘리는 두 사람의 모습이 닮아 있다고 말한다. 미소를 지으며 그런 이야길 하는 걸 보니 우리 모습이 흉하거나 괴롭지는 않나보다. 그 모습이 사랑스러울 수 있다면 가족으로선 다행이다. 세수를 하고 입안을 찬물로 헹군다. 아내와 간단한 아침식사를 한 후 아내를 문 앞까지 배웅한다. 방으로 돌아와 자고 있는 네 살짜리 아이의 상태를 확인한다. 콧물은 밤사이 계속 흘렀는지, 며칠 전부터 시작된 기침은 멈추었는지, 손발은 차가운지 만져보고 손가락으로 가만히 심장박동을 확인한다. 심장이 새근새근 뛴다. 호흡도 괜찮다. 아이를 천천히 잠에서 깨울 준비를 한다. 밥을 먹이고 옷을 입히고 가방을 메어주고 어린이집으로 데려다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오후 5시 반이면 아내가 아이를 찾으러 올 것이다. 아내가 올해부터 직장에 다시 나가기 때문에 매일 아침 나는 이런 일상을 반복하고 있다.
아이가 생기고 몇 년 혼자서 밥벌이를 하고 글을 썼다. 몇 권의 책을 출간했지만 생활에 별 도움이 되지 못했고, 대체로 문학적 긴장도 형편없었다. 나는 프리랜서 글쟁이로 지내 온지 10여 년이 훌쩍 넘었기 때문에 글감을 마무리하면서 생계를 유지하는 일에는 익숙한 편이다. 혼자 살 때까지는 그럭저럭 지낼 만 했다. 근데 아이가 생기고 나서부터는 지면에서보다 몸에 땀이 흐르는 경우가 많아졌다. 세상에 나만 아이를 키우는 것도 아니지만 몇 년 사이 나는 자다가 식은땀이 늘만큼 형편을 고민하는 일이 많아진 것이다. 물론 어떠한 생활이 닥쳐오더라도 시를 지키기 위해 문학적 긴장을 유지하는 일은 중요하다. 생활형편이 어려워져 시 쓰기가 어렵고 고단하다는 엄살을 피우고 싶다는 게 아니다. 오히려 나는 그 반대편에서 조금 우렁차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육아를 담당하던 아내를 일터로 내보낼 수 밖에 없는 지경에 다다랐지만, 아내는 내가 전업작가로서 집중하고 지낼 수 있도록 돕고 싶다는 선택을 '감행'해 준 것이다. 내 쪽에서 그건 눈물나게 고마운 일이지만, 분명 아내의 판단 속엔 글바느질을 해서 먹이를 나르는 내 솜씨가-몇 년 지켜보니- 형편없어 보였을 테고 꽤 불안했을 것이다.
생계를 위해 글을 쓰는 작가의 삶을 나는 존중한다. 데뷔 후 막막하고 먹먹하던 시절 고스트라이터로 대필이나 야설작가로 살던 시절부터 생존과 실존의 영역에서 글쓰기를 어떻게 지속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은 귀했다. 작가는 쓰는 삶을 택한 자들이다. 쓰는 동안 작가는 우리가 어디에서 왔고, 어디에 머무르고 있으며, 어디로 가는지에 대해 글썽일 수밖에 없는 존재다. 세속의 기준으로 그 글이 얼마나 팔려나갔으며 미학적 완성도가 어느 정도인가 하는 문제는 삶을 뻔뻔하게 만들지 못한다. 쓰는 삶을 몸에 녹아들도록 습관을 만드는데 나는 여전히 고군분투중이다. 어떤 삶의 지경에 놓여 있건 문학적 긴장을 유지하는 습관은 작가에겐 눈여겨볼만한 뚝심 같은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요즘 아이를 어린이집에 데려다 주기까지 오전의 2시간 동안 내가 처음 겪어보는 이 생활의 긴장도 문학적 긴장못지 않게 상당히 귀하게 여기려고 한다. 태어나서 처음 경험해보는 이 '임무'는 벅차기도 하지만 대충 할 수 없는 일이다. 아내에겐 익숙한 일이었을 일이 내겐 곤혹스러운 순간이 매순간 찾아오기 때문이다. 밥 한 숟가락을 먹이기 위해 거실을 뛰어다니고, 아이의 겨드랑이를 들어 팔 한쪽을 옷 속에 넣기 위해 수많은 이야기(때론 선의의 거짓말을 포함한다) 마술사가 되어야 한다. 오늘 아침 아이는 내게 알려주었다. "아빠 또봇은 엔진오일을 먹으니까 기저귀를 찰 수 없어요.", "그래 그런 것 같다.", "아빠, 어린이집에서 배고프면 기저귀를 먹어도 되요?", "안돼. 안돼 그러지마. 그건 정말 안돼!"
김경주 시인ㆍ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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