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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시간 76분

입력
2014.03.14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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흩어져있는 악보를 하나로 묶어 제본하면서 독주회를 위한 연습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번 악보는 총 97페이지, 연주시간 76분의 분량이다. 8명 작곡가로부터 10개의 작품을 구성했으니 한 무대에서 팔색조의 연기변신이 필요한 셈이다. 독주자는 홀로 무대에 올라 모노드라마를 펼치는 고독한 연극배우를 닮았다. 다수의 객석을 혼자 마주한 채 무대를 장악할만한 맷집을 갖춰야 한다. 연기자가 대본을 달달 외우듯 나 역시 앞으로 97페이지의 악보를 철저히 암기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텍스트를 대하는 자세는 연주자와 연기자가 다소 다르다. 상황에 따른 즉흥적 자유가 허용되는 연극의 에드리브와 달리 악보는 한 토시의 음절도 더하거나 덜함이 없어야 한다. 음표의 첨삭은 작곡가에 대한 불경으로까지 비화하는 까닭이다. 그러니 종종 연기자들이 부럽다.

음대 휴게실, 현악주자들과 피아니스트들 사이에 우스꽝스러운 언쟁이 일어났다. 강사들이 우연히 모여 가볍게 차를 마시는 자리였다. 대학에서 논문과 같은 연구실적을 요구할 때, 음악대학의 강사들은 연주회 경력으로 이를 인정받는다. 음악회를 통째로 암기해 연주하는 피아노 독주회의 경우 가산점을 더 주어야 하는 것 아니냐며, 피아니스트들이 현악주자들에게 짓궂은 농을 건넸다. 단선율 악기와는 암보의 차원이 다른데다, 무반주 작품까지 종종 악보를 보면서 하는 현악 연주회가 얄밉다고도 칭얼거렸다. 그러자 현악주자들이 발끈했다. 매 순간 모든 음의 음정을 새로 맞추어야 하는 현악기에 비하면, 조율사가 맞춰 준 대로 건반만 땡땡 누르면 되는 피아노 연주는 날로 먹는 거 아니냐는 대꾸가 오간 것이다. 이 자리의 분열은 커피값을 갈라내는 것으로 우스꽝스레 마무리되었다.

낭만주의 음악가 프란츠 리스트는 자신의 빼어난 연주기교를 과시하기 위해 피아노 독주회에 암보연주를 정착시켰다. 현재 피아니스트들의 공분을 살만한 인물인 셈이다. 수려한 외모에 거침없는 청중 장악력을 지녔던 그는 유럽 곳곳을 순방하며 일약 클래식계의 아이돌 스타로 떠올랐다. 이때만 해도 무대 위 피아노 위치는 지금과 달리 객석에서 건반이 보이도록 배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리스트는 청중의 시선이 뒤통수나 등짝에 머무는 것을 원치 않았다. 오뚝한 콧날과 화려한 팔 동작을 뽐낼 수 있도록 그는 악기의 방향까지 과감히 돌려놓았다. 이처럼 리스트의 자기과시 욕구는 오늘날 피아니스트들이 짊어져야 할 암보연주의 강박까지 그 잔상을 드리우게 되었다. 게다가 대개 자신이 작곡했던 곡들을 연주했으니 암보의 부담은 지금보다 현저히 덜했을 것이다. 얄미운 사람.

무대 위에서 일어나는 숱한 돌발변수 중 연주자들이 느끼는 가장 큰 공포는 기억력의 암전이다. 특히 엉킨 실타래처럼 꼬여있는 바흐의 복잡한 다성부 곡들은 마지막 음에 도착하는 순간까지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다. 한 친구는 제의를 치르듯 그 혼잡한 성부를 깨끗한 오선지에 한음한음 옮겨 적기도 한다. 암보에 실질적 도움을 주는지 묻자, 히죽해죽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냥 일종의 플라시보 효과 같은 거야." 나는 그에게 또 다른 장치를 제안했다. 곳곳에 이정표를 만드는 거야. 암전이 엄습하면 매번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곳으로 찾아갈 수 있도록.

반면, 20세기의 전설적 피아니스트 스비아토슬라브 리히터는 삶의 말년에 페이지 터너를 당당히 대동한 채 무대에 올랐다. '암보는 지능의 낭비'이며 '악보를 외울 시간에 차라리 연습을 더 하겠다'는 거장의 파격적 언급은 피아니스트들에게 혁명과 같은 발상의 전환을 가져왔다. 하지만 회고록에서 토로한 속사정은 슬펐다. 노화로 인해 점차 청력을 잃으면서 절대음감에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는 것. 암보는 청각적 기억력에도 강력히 의존하기 마련이다. '솔솔 라라'가 '라라 시시'로 들리게 되면 연주자는 금세 길을 잃고 만다.

무대 위 예기치 않던 변수를 만나 우당탕 나동그라졌을 때, 연주자의 머릿속엔 단 한 가지 절규뿐이다. '이다음 음이 뭐지?' 그 우당탕 웃지 못할 에피소드는 다음 칼럼에.

조은아 피아니스트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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