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볼 수 있는 사람, 만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 자신만의 시선으로 내 마모된 몸을 완성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나는 그곳이 어디든 쉬지 않고 달려갔다. 타인의 꿈으로 이어지는 수많은 문들이 있었다."('영원의 달리기' 중)
소설가 조해진(38)의 두 번째 소설집 에는 '작가의 말'이 따로 없다. 아마도 저 문장을 써놓고서 그런 결심을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9편의 단편소설이 수록된 이번 책에서 작가는 "자신들의 이야기가 아무도 들어줄 수 없는 구차한 혼잣말 같다"('이보나와 춤을 추었다')고 느껴지는 이들의 외롭고 떨리는 목소리를, 흡사 채록하듯, 차분하고 섬세한 문장들로 옮겨놓는다. 어디에 서 있어도 타인의 아픔을 예민하게 감지해내고 그쪽으로 고개를 돌릴 것 같은 그는 2004년 등단해 등 세 편의 장편소설을 내놓은 바 있다.
소설집은 외국의 사람과 공간이 무시로 드나드는 한국소설의 탈경계 경향의 한복판에 있다. 한국에서 네덜란드에 입양된 베로니카는 언제나 신중한 예의를 잃지 않았던 양부모가 친딸의 신장이식을 위해 동일 혈액형의 자신을 입양했음을 알게 된 후 사랑 받으려는 일체의 노력을 중지하고 다이어리 '이 달의 계획' 마지막 줄에 늘 자살이라고 써넣는다('PASSWORD'). 어머니를 식물인간으로 만든 죄책감으로 이국을 떠도는 남동생 K에게 병원으로부터 산소호흡기 제거를 종용 받는 누나는 깊은 숨을 들이쉰 후 힘겹게 '너의 잘못이 아니야'라고 엽서를 쓰고('목요일에 만나요'), 애인을 잃었다는 아픔을 공유하는 한국과 캐나다의 동성애자는 또 다시 사랑에 실패하면서 "자신의 고통이 더 커 보인다면 그건 더 이상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내가 가장 불행하다고 생각했던 시절이 사실은 진심으로 사랑했던 한때였음"을 인정하게 된다. ('북쪽도시에 갔다')
익숙하지만 핍진한 화법으로 타인의 고통을 얘기하는 소설들은 소통과 연대와 위로를 넌지시 암시한다. 미약해도 좋다. 다만 슬픔 앞에서 우리는 예의를 차려야 한다. "거인이 울 땐, 그저 가만히 서서 그들의 슬픔이 잦아들 때까지 기다려주어야 한다. 이것이, 이보나가 내게 가르쳐준 세상에 대한 예의였다."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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