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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라이벌 경제학자 '세기의 격돌' 지금도 진행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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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라이벌 경제학자 '세기의 격돌' 지금도 진행중

입력
2014.03.14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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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케인스 "국가가 경제 개입해야"1930년대 대공황 발생은 저축이 투자보다 많아 발생… 정부가 통화정책 등 수행을● 하이에크 "시장 자유에 맡겨야"투자가 저축보다 많아 생긴 것… 국가가 개입하지 않으면 수요·공급 따라 시장 움직여

존 메이너드 케인스(1883~1946)와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폰 하이에크(1899~1992)는 경제학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논쟁을 벌였다. 이들의 인연은 엽서 한 장에서 시작됐다. 오스트리아 빈의 젊은 경제학자 하이에크는 1927년 영국 재무부 협상가로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던 케임브리지 킹스칼리지의 케인스에게 엽서를 보냈다. 50년 전 프랜시스 이시드로 에지워스가 저술한 '수학을 도덕과학에 적용하는 시론'이라는 괴기한 부제가 달린 을 보내달라는 부탁이었다. 하이에크를 몰랐던 케인스는 "애석하게도 수중에 재고가 다 떨어졌군요"라는 한 줄짜리 답장을 보냈다.

영국 일간 타임스 창간 편집인이자 저술가 니컬러스 웝숏이 '세계 경제와 정치 지형을 바꾼 세기의 격돌'이라는 부제를 단 에서 '국가의 개입' 대 '시장의 자유'라는 화두를 놓고 100년 가까이 벌인 두 거장의 논쟁을 명료하게 정리했다. 주요 주장과 논박은 두 인물의 실제 발언을 그대로 가져와 보여줌으로써 논쟁의 한 가운데에서 양쪽 의견을 직접 듣는 듯한 느낌을 갖게 만든다.

케인스는 앨프리드 마셜의 가르침을 토대로 한 케임브리지대 중심의 영국 경제학파에 뿌리를 두고 있다. 반면 하이에크는 루트비히 폰 미제스가 설파하는 자본 투자이론 중심의 유럽 대륙 경제학파가 바탕이다. 오스트리아학파의 새내기 하이에크는 케임브리지대를 누르고 영국 경제이론 산실로 발돋움하려는 런던경제대학(LSE)에 영입됐다. 1931년 여름 하이에크는 케인스에게 첫 포문을 연다. 학술지 이코노미카에 케인스의 을 비판하는 서평을 기고한 것이다. "케인스의 서술방식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난해하고 체계가 없어 독자가 제대로 이해할지 의문스럽다"고. 격분한 케인스는 11월 같은 학술지에 반론을 썼다.

두 라이벌은 1930년대 대공황 발생 원인을 놓고도 격돌했다. 케인스는 저축이 투자보다 많아지면 불황이 생기고 물가가 떨어진다고 했다. 경기가 바닥을 치면 만성적인 수요 부족으로 경제활동이 둔화돼 불필요한 실업이 발생한다고 봤다. 대공황도 저축이 투자보다 많아 생겼다는 것이다. 따라서 물가 상승은 저축을 늘려 억제할 수 있고 불황은 투자를 늘리고 총수요를 증가시켜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케인스는 충분한 수요를 발생시킬 기업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정부가 공공사업을 통해 수요를 창출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를 위해 정부는 통화정책(금리 인하 및 통화 공급량의 증대), 세금 감면, 공공사업을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이에크는 불황이란 생산자가 은행 융자로 돈을 빌려 자본재를 더 많이 생산하는 등의 이유로 통화량이 늘어나고 신용이 과잉 팽창한 결과라고 여겼다. 대공황도 투자가 저축보다 많아서 발생했다고 한다. 가만두면 가격 메커니즘에 따라 상품의 공급과 수요가 일치할 텐데 중앙은행이 인위적으로 금리를 낮추거나 높여 저축과 투자의 관계에 개입하는 것을 문제의 핵심으로 짚었다. 국가가 통화시스템에 개입하지 않는다면 경기 순환도, 불황도 사라질 것이라는 주장이다.

불황과 실업의 해법에서도 부딪쳤다. 케인스는 (1936)에서 '승수 효과' 개념을 도입해 "정부가 돈을 써서 공공 토목 공사를 벌여 노동자를 직접 고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이에크는 (1944) 등에서 "자유시장은 장기적으로 모든 사람이 고용되는 균형 상태로 경제를 되돌려 놓을 것이기에 인위적 부양책을 쓸 게 아니라 영구적 해결책이 스스로 자리잡도록 시간을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역사는 누구 손을 들어 주었을까. 1929년 발생한 대공황은 케인스의 생각이 퍼져 나가는 토양이 됐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대공황을 극복하기 위해 펼친 뉴딜 정책은 케인스식 경기 부양의 대명사가 됐다. 하버드대는 케인스 혁명의 중심지였고 폴 새뮤얼슨,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 등 케인스의 복음을 전파하는 사도들도 늘어났다. 1960년대 후반까지 '케인스 독무대'였다.

그런데 1970년대 불황으로 실업이 늘어나는데도 물가가 오르는 스태그플레이션이 찾아옴으로써 케인스혁명이 막을 내렸다. 대신 하이에크는 1974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하며 상승세를 맞았다. 2년 뒤 그의 지원군인 통화주의자 밀턴 프리드먼까지 노벨상을 받으면서 하이에크 시대가 열렸다. 1974년 집권한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와 1981년 집권한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하이에크의 충실한 문하생이었다. 이들은 세금과 산업규제를 줄이고 법인세를 낮춰 생산활동을 고무하는 공급 측면 경제학 정책(신자유주의 정책)을 폈다.

그러나 2008년 세계적 금융위기로 하이에크 경제학은 치명상을 입었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케인스주의적 부양 조치를 취하며 케인스는 화려하게 부활한다. 이것도 잠깐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부양책이 별다른 효과가 없자 하이에크가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태곳적 공룡만큼이나 고루한 사람, 자유주의적 유토피아주의자"(하이에크), "미래 세대의 주역인 아이들을 꼬드겨 감당할 수 없는 채무의 암흑으로 데려가는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 자본주의의 진정한 수호자"(케인스)로 극단적인 평가를 받는 두 맞수의 대결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사족으로 두 사람은 사랑에 있어서도 통이 크거나(케인스), 자유주의적(하이에크)이었다. 케인스는 인생의 절반을 동성애자로 살다 러시아 발레리나와 사랑에 빠져 결혼했고, 두 자녀를 둔 하이에크는 조강지처를 버리고 첫사랑과 결혼했다.

권대익기자 dkw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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