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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까지 금기시됐던 '자살'… 철학·문학이 사회현상으로 이끌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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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까지 금기시됐던 '자살'… 철학·문학이 사회현상으로 이끌어 냈다

입력
2014.03.14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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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로마를 살았던 미모의 여성 루크레티아. 불행하게도 남편의 친척에게 겁탈당한 뒤 그녀는 지인들에게 복수를 부탁하고 자결했다. 그녀는 후대에 아름답다는 찬사를 받으며 정절의 상징이 됐다. 표지에 등장하는 여성이 바로 루크레티아다. 죽음을 결심하고 칼 끝을 가슴에 겨눈 표정에서 절망과 원망이 보이는 듯하다. 어찌 보면 모든 걸 내려놓은 체념이 드러나 있는 것도 같다.

'자발적인 죽음'은 살아남은 이들에게 끊임없이 답 없는 물음을 던진다. 왜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나. 오죽하면 목숨까지 버렸을까. 물음이 꼬리를 물다 보면 옮긴이의 말처럼 자살은 결국 "산 자들의 실패를 고발하는" 행위로 귀결된다. 아내를 지켜주지 못한 남편, 아픔을 치유해주지 못한 가족, 국민을 보호하지 못한 국가의 실패가 불러온 비극이 된다. 이 비극 앞에서 생명의 소중함을 부르짖는 목소리는 공허할 뿐이다.

책에 따르면 인류는 16세기 후반 들어서야 자살을 선택한 사람의 내면을 헤아려보기 시작했다. 그 전에도 일부 지식인이 자살을 논하긴 했지만 자신의 몸을 자신이 해칠 수 있는 권리가 종교와 도덕의 가치를 능가할 수 있느냐 하는 이론적 관점에 그쳤다. 16세기까지는 자살을 살고자 하는 자연스러운 경향과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맡은 역할과 생명의 주인인 신에 대한 침해로 규정하고 절대적으로 터부시했다. 때문에 자신을 해한 이들은 시신이 모독당하고 유족의 재산이 몰수당하는 중벌을 받아야 했다.

금기에 갇혀 있던 자살을 일종의 사회 현상으로 보는 시각을 만드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은 철학과 문학이었다. "고통이 사람을 그 자신의 원수로 만들어 살기보다 죽기를 더욱 애절히 바라게 된다면 그자는 세상을 떠나고자 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가"(올레닉스 뒤 몽-사크레, )라고 반문하는 학자와 작가들에게 신학은 여전히 자살은, 비록 순교일지라도, 단죄해야 할 대상이라며 맞섰다.

17세기에 와선 자살의 정당성 논쟁이 영역을 확장했다. 의학자와 법학자들은 자살이 원칙적으로 죄이긴 하지만 우울증 같은 심리적, 생리적 이유 때문이라면 처벌을 면해야 한다는 의지를 보였다. 엘리트 계층이 드러내놓고 논쟁을 이어갔는데도 자살 빈도는 여전히 비슷했다. 자살이 학문적 관심 거리이기 이전에 현실 자체였기 때문 아닐까. 어떤 이론이나 논문도 좌절과 두려움에 빠진 인간의 선택을 여실히 설명해내지 못했을 테니 말이다.

이 와중에 언론이 등장했다. 쉬쉬하며 입에서 입으로 얘기해오던 자살을 보도하기 시작한 것이다. 명예나 수치, 가난뿐 아니라 사랑, 갈등, 회한, 가까운 이의 죽음 등의 소소한 일상사가 자살을 부를 수 있다는 사실이 공론화했다. '자살은 개인의 자유 문제'라는 인식도 자리 잡기 시작했다. 1774년 괴테의 과 함께 이를 둘러싼 논쟁은 정점에 달했다. 이렇게 공들여 쌓은 자살 담론은 그러나 19세기 들어 부분적으로 무너졌다. 물질제일주의와 무한경쟁, 정신의학 등이 자살을 정신이상 행위로 몰아갔다. 원인을 설명하는데 집착할 뿐, 자살을 정당화하는 건 논외로 쳤다.

읽는 내내 마음이 편치 않은 책이다. 자살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의식 구조가 변해오는 동안에도 누군가는 계속해서 희생됐음을 책은 각인시킨다. 19세기 이후 본격적으로 확보된 자살 통계자료를 동원해 문학과 인문학이 수많은 관점을 피력해왔지만, 역사학자인 저자는 여전히 자살의 근본 문제에 관해서는 자살 성찰이 각별했던 16~18세기를 뛰어넘는 진전이 없다고 못박는다. "죽음보다는 삶이 낫다는 전제를 당연하게 깔고" 있다면 앞으로도 그럴 거라면서. 생명윤리는 고귀한 가치로 여기면서 죽음윤리는 논의조차 없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는 의미로 읽힌다. 셰익스피어가 1600년 던져놓은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라는 물음이 그래서 너무나 심란해진다.

임소형기자 precar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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