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뒤늦게 가습기 살균제 피해 구제에 나섰지만 폐손상 이외의 피해는 아예 판정대상에서 빠져 논란이 되고 있다. 질병관리본부 폐손상조사위원회는 가습기 살균제 성분이 심혈관 질환, 간암 등 다른 질병을 일으킨다는 동물실험 결과를 확보하고서도 이에 대한 피해인정 기준을 만들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13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가습기살균제 피해조사 결과 설명회 및 피해자지원방안 공청회'에서 강찬호 가습기살균제피해자와가족모임 대표는 "조사가 폐 질환에만 집중돼 이외의 다른 질환은 종합적으로 고려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가습기 살균제를 쓴 이후 불규칙한 심박동과 가슴 통증을 앓게 된 류명섭(70∙서울 송파구)씨는 "가습기 살균제 사용 이후 심장질환에 걸려 현재 119구급대 심장병 응급 환자로 등록돼 있다"며 "가습기 살균제 피해를 왜 폐에만 국한시키는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김태종씨의 아내는 애초에 호흡기질환이 있었다는 이유로 피해자 인정을 받지 못했다. 김씨는 만성 기관지확장증으로 호흡이 어려운 아내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2007년부터 대형마트에서 산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했다. 그전까지만 해도 교회 성가대에서 활동할 정도로 일상적인 활동에는 어려움이 없었던 아내는 한두 해 지나면서 점점 숨 쉬기가 힘들어졌다. 결국 "폐 기능이 15%만 남았다"는 진단을 받고 산소호흡기에 의지해 하루 하루를 버티고 있다. 하지만 폐 손상 증상이 다르다는 이유로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에서 제외됐다. 김씨는 "한 줄기 희망을 걸고 있던 피해자 가족을 두 번 죽인 무책임한 조사"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로 유산한 김태은씨는 "피해를 인정받은 첫째 아이와 같은 공간에 있던 남편은 폐혈관이 터져 고생하고 있는데도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며 "도대체 판정 기준이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토로했다.
이번에 조사 받은 361명 중 피해를 인정받은 것은 46.6%인 168명이다. 나머지는 세기관지 손상 등 폐의 특이증세가 없거나, 폐 질환이 아닌 다른 질환이라는 등의 이유로 피해자 인정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질병관리본부 폐손상조사위원회는 가습기 살균제 성분의 폐해가 폐 손상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2011년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의심사망자가 처음 발생한 후 경북대와 영남대에서 진행한 동물실험에서 다른 장기 손상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물고기 실험에서는 심장 대동맥이 딱딱하게 굳는 심혈관 질환이 나타났고, 가습기 살균제의 살균성분과 화학적 성질이 매우 비슷한 다른 물질은 쥐에서 간암을 유발했다.
그런데도 조사위원회가 폐 손상 외의 다른 질환들을 아예 피해 판정에서 배제한 것은 조사위원들 사이에 기준이 합의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백도명 폐손상조사위원회 공동위원장은 "사람을 대상으로 한 연구 결과가 없는 상태에서 몇 가지 동물실험 결과로 위험성을 판단하려니 위원들 간 의견이 엇갈려 (폐 손상 외의) 다른 질병은 신경 쓰지 못했다"고 말했다. 조사위원회는 병리학 영상의학 임상의학 환경노출평가 등 각 분야 전문가 29명으로 구성됐다. 상대 부처 소관이라며 미루다 여론에 떠밀려 뒤늦게 피해자 구제에 나선 정부가 피해자 조사에서도 아무 의지가 없었다는 사실이 드러난 셈이다.
백도명 위원장은 "다른 질환으로 고생하는 의심피해자에 대해 추가 조사를 진행하는 한편, 연관성 검토를 통해 현재의 기준도 보완하겠다"고 했지만 판정기준을 만들려면 영향평가 등을 새로 해야 해 지원을 받기까지는 상당 시일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환경보건시민센터 임흥규 팀장은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고통이 계속되지 않도록 피해자에 대한 지원과 재조사는 철저하고 시급하게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변태섭기자 liberta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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