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스북을 더 이상 안 해요. 주변 소식들을 별고 알고 싶지 않아 진 거죠. 봄도 오고 꽃도 필 텐데 좋은 것을 봐도 좋지가 않아요. 괜히 서럽고 가끔은 눈물도 나요."(취업 삼수생 김 모씨ㆍ26)
3월. 그에겐 아직도 혹독한 겨울이다. 지난 2년간 그에겐 겨울 뿐이었고 취직이 되기 전까지는 계속 그럴 것이다.
봄과 가을, 매년 두 번씩 치르는 전쟁. 대기업 입사전쟁이다. 대기업들의 상반기 공채가 시작되면서, 취준생(취업준비생)들은 2014년 1차 전쟁에 돌입했다.
서울 소재의 사립대에 재학 중인 이나리(가명ㆍ25)씨는 취업 재수생이다. 4학년 때인 작년 가을 첫 도전에서 고배를 마셨고, 이번에 두 번째 시험을 준비 중이다. 아무래도 적(籍)을 유지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졸업도 미뤘다.
오전 9시. 그는 알람 소리에 맞춰 눈을 떴다. 집이 학교 근처라 씻고 준비해서 학교 도서관에 도착하니 9시 반. PC를 켜고 자기소개서(자소서)를 써 내려간다. 자소서는 서류전형통과를 위한 핵심항목. "지금까지 주어졌던 일 중에 가장 어려웠던 경험은 무엇이었나요?" 란 질문에 답을 해야 하는데, 영 쉽지가 않다. 벌써 며칠째 자소서와 씨름 중이다.
자소서 작성을 잠시 멈추고 인적성 검사 문제집을 펼친다. 그는 작년 공채 때 3군데 대기업에서 서류전형을 통과했지만 결국 인적성 검사에서 고배를 마셨다. 언어, 수리, 추리, 직무상식 등으로 구성된 모의고사 1회분을 집중해 풀었다.
벌써 오전이 다 흘렀다. 점심 식사는 구내 식당에서 간단히 해결. 다시 도서관으로 돌아와 자소서를 또 수정하고 이번엔 토익 공부를 한다.
오후 5시부터는 스터디다. 취준생 4명이 모여 하는 토익 스피킹. 2명씩 짝을 지어 2시간 동안 영어로 질문하고 답변하는 연습을 한다. 서류전형에서 자꾸 탈락하는 게 영어성적(토익 800점 초반ㆍ토익스피킹 레벨6) 때문인 것 같아 이젠 30만원을 내고 학원수업을 병행할 계획이다.
7시 반부터 또 다른 스터디의 연속. 1회분씩 풀어온 인적성검사 모의고사를 바탕으로 어려운 문제를 공유하고 같이 해답을 찾는다. 아울러 면접도 연습하는데, 한 명이 가상면접관이 돼 예상질문을 던지고 한 명은 앞에 나가 준비해온 답을 말하는 식이다.
지친 몸으로 집에 돌아와 씻고 잠시 쉬면 시계는 벌써 12시를 향해 있다. 다람쥐 챗바퀴같은 하루는 이렇게 마감된다. "작년 하반기 공채 때 열 군데를 지원했는데 결국 다 떨어졌어요. 주변에서 열 군데는 너무 적다고 하더라고요. 실제로 스무 군데 이상 넣는 경우도 많아요. 이번 봄 시즌에 꼭 합격하면 좋을 것 같은데 뽑는 데가 많지 않아 사실 큰 기대는 하지 않고 어쨌든 가을에는 취준생 꼬리표를 떼고 싶어요."
홍재용(가명ㆍ30)씨는 올해를 대기업 응시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한다. 행정고시 준비를 하다가 뒤늦게 대기업으로 선회했기 때문에 나이가 꽉 찼다. 더 나이가 들면 대기업들도 뽑지 않을 것 같아 올해 승부를 봐야 한다. "친구들은 거의 다 취직해 회사에 다니거든요. 지난해 삼성, 롯데, 한화 등 20곳이 넘는 기업에 지원했는데 모두 낙방했어요.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올해는 닥치는 대로 다 지원할 생각이에요."
그는 시간이 얼마 없다고 생각하니 자꾸 마음이 조급해진다. 토익(880점)과 학점(4.3 만점에 3.6)은 나쁘지 않은 편인데, 어학연수나 대외활동 같은 '스펙'이 별로 없는 게 걱정이다. 무엇보다 적극적이고 밝았던 성격은 점차 소극적이고 사람을 피하는 성격으로 바뀌어 가는 것 같아 서글프다고 했다. 그는 "장기간 합숙면접을 한다든지'나'라는 사람을 다층적으로 평가해줬으면 좋겠는데, 획일적인 잣대로 면접 기회조차 주지 않는 기업들이 야속하게 느껴질 정도다. 그래도 물러설 곳이 없어 900점을 넘기기 위해 토익 공부를 6시간씩 한다"고 말했다.
김영미(가명ㆍ28)씨는 졸업 2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취준생. 워낙 입사시험을 많이 치르다 보니 별의별 광경을 다 본다고 했다. "아나운서 시험도 아닌데 면접 때 머리부터 발끝까지 관리를 받고 오는 것은 기본이지요. 아침부터 오후까지 담당자와 함께 하는 은행권 면접을 본 적이 있는데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아이스브레이킹(분위기 전환용 행동)'까지 를 준비하는 경우도 있어요. 취업준비인지 만능형 인간에 도전하는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아요." 지금까지는 주로 금융기관에만 응시했는데, 이젠 좋든 싫든 모든 공채에 다 도전할 계획이다.
서정철(가명ㆍ28)씨는 최근 대기업 입사를 포기했다. 4.5점 만점에 4.0학점, 중국어도 유창하다. 그런데도 지난해 30군데 기업에 원서를 냈지만 모두 낙방했다. 대체 뭐가 잘못된 걸까. "떨어지는 이유라도 알면 고치기라도 하겠는데, 대체 어디서 뭐가 잘못됐는지를 모르겠더라구요. 이런 상황에서 무작정 좋은 말로 자기소개서만 쓰고, 적성과 관계없이 무조건 지원만 하는 나 자신을 보니 이건 아니다 싶었습니다." 그는 현재 아버지가 운영하는 작은 회사에서 일을 배우고 있는데, 대기업의 꿈을 접은 것에 전혀 후회가 없다고 했다.
채지선기자 letmeknow@hk.co.kr
성지은 인턴기자 (이화여대 언론정보학과 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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