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사실 웃기는 사람 아닙니다!
“이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인기 레크리에이션 강사 겸 사회자로 활동하고 있는 이성원(35)씨가 제일 많이 하는 말이다. 감사할 만하다. 행사가 많을 때는 한 달에 50여 군데씩 뛴다. 인기 아이돌처럼 링거 투혼을 발휘해야 할 때도 있지만 대학 졸업 후 일이 없어서 명함 뭉치를 들고 여기저기 홍보를 하러 다니던 시절을 생각하면 힘들어도 마음만은 행복하다.
지금은 마이크만 들면 사람들이 웃음보따리를 풀어놓기 바쁘지만 지금의 경지에 이르기까지 피나는 노력을 했다. 이씨의 ‘웃음’ 경력은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장아장 걸을 때부터 성인 가수 흉내를 내서 어른들을 곧잘 즐겁게 했고,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으레 응원반장을 맡았다. 대학 입학 후에는 학교 수강 신청보다 레크리에이션 수료증 지원서를 먼저 썼다. 학과 공부보다 유머 연구에 더 열심이어서 교수님들에게 꾸중을 듣기도 했지만 자기 길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에 흔들리지 않고 ‘웃기는’ 일에 전념했다.
고참 250명 앞에서 레크리에이션 진행
축제 사회에서 재롱잔치까지 들어오는 행사는 무엇이든 마다하지 않고 달려들었다. 배우는 과정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는 여러 행사 중에서 가장 힘들었던 행사로 군에 입대해서 본 첫 사회를 꼽았다. 자대에 배치 받고 20일 만에 부대 장기 자랑 행사에 사회자로 뽑혔다. 객석에 앉은 250명 전원이 ‘고참’이었다. 평소 연습한 대로 했지만 고참들은 좀체 웃지 않았다. 그러다 무심결에 뱉은 멘트 하나에 빵 터졌다. “1등 하신 분에는 부상으로 알로에 비누를 드리겠다”는 말이었다. 처음엔 영문을 몰랐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보급 비누가 ‘알로에’였다. 흔해 빠진 비누를 부상으로 주겠다고 했으니 웃음이 터질 수밖에. 단번에 공감대가 형성됐다. 그 뒤로는 모든 순서가 술술 풀렸다.
“그때 아주 중요한 걸 깨달았어요. 이를테면, 내가 어떻게 웃기느냐 하는 것보다 어떻게 공감대를 형성하느냐, 마음의 문을 여는 가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거죠.”
그는 행사가 있으면 항상 한 시간에서 두 시간 일찍 현장에 간다. 사람들과 충분한 대화를 통해 모임의 성격과 성향을 파악해서 초반 분위기를 잡는다. 이를테면 고위 공무원 연수자들을 대상으로 한 레크리에이션에서는 “1등 하면 30분 일찍 보내주겠다”는 공약을 내건다. 빨리 마치고 집에 가려는 마음밖에 없기 때문이다. 반면 유치원 재롱잔치에서는 아이들에게 요즘 유행하는 캐릭터나 딱지 이야기로 관심을 끈다. 공감대를 형성하는 과정이다.
두 번째 전략은 친근한 분위기 형성이다. 그는 후배들에게 늘 “웃기려고 하지 말고 먼저 웃어줘라”고 강조한다. 그는 이것이 ‘겸손’이라고 했다. 자신감도 중요하지만 객석을 온 몸으로 끌어안고 자신을 낮추는 자세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일상에서 사람을 만날 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나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내 욕심 다 차리면서 상대를 웃게 할 수는 없습니다. 웬만하면 웃어주고, 들어주고, 추임새를 넣어주면 상대는 자기도 모르게 웃습니다. 웃기는 사람보다 웃음이 나오는 분위기를 만드는 사람이 되는 게 더 중요하죠.”
방황하는 청소년들에게 꿈과 웃음 전하고파
이 모든 노하우를 다 발휘해도 진행이 힘든 행사가 있었다. 대학을 졸업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맡았던 어느 사립고등학교의 교장 선생님의 퇴임식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어색하고 서먹한 분위기가 행사 끝까지 가시지 않았다. 알고 봤더니 교장 선생님은 학교를 떠날 생각이 없는데 윗분 때문에 억지 퇴임을 하는 처지였다.
“마치 수렁에 빠진 것 같았어요. 침울한 분위기를 벗어나려 하면 할수록 더 이상해지는 행사였죠. 아무도 웃을 상황이 아니었으니까요. 지금 생각해도 등에 진땀이 나네요.”
언제라도 다시 뛰어들고 싶은 행사도 있었다. 5년 전 모 대안학교에서 주최한 행사에 마이크를 들고 갔다. 아버지와 자녀를 한 자리에 모아놓고 화해를 유도하는 것이 행사의 취지였다.
“아이들에게 말을 걸면 한 대 칠 듯이 노려보더라고요. 이거 또 늪인가 싶더라고요.”
오전에는 아버지와 함께하는 놀이를 통해 서서히 마음을 열었다. 저녁에 다시 만나 아버지에게 편지 쓰기, 자녀의 발 씻어주기, 아버지가 깜짝 케이크를 선물하는 순서 등을 진행하자 아이들의 태도가 점점 변했다. 나중에는 강당이 눈물바다로 변했다.
“일하는 보람을 제대로 느끼고 왔죠. 소위 말하는 소위 계층을 대상으로 하는 행사에는 일순위로 달려갑니다.”
이런 경험 때문일까. 그의 다음 목표는 청소년 강연 전문가다.
“방황하는 청소년들을 많이 봤어요. 성적을 떠나서 꿈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에게 웃음으로 버무린 꿈과 희망의 강의를 들려주고 싶어요.”
그에게는 그럴 자격이 충분해 보인다. 그는 이미 많은 이들에게 ‘꿈’ 그 자체다. 레크리에이션 강사와 사회자를 꿈꾸는 이들에게 그는 하나의 롤 모델이다. 2009년에는 동기와 후배들 7명을 모아 ‘MC 컬러풀’이라는 단체도 만들었다. 개그 콘서트 팀처럼 틈틈이 모여 아이디어 회의도 하고 멘트도 짠다. 그는 “더 노력해서 10년ㆍ20년 뒤에는 한국을 대표하는 ‘공감과 웃음’ 그리고 ‘꿈’의 대명사가 되고 싶다”면서 “보수의 대명사 대구인(人)을 웃기는 MC인 만큼 전국구로 발돋움하는 것도 시간 문제”라고 자신감을 나타냈다. ‘김제동’이 한 명 더 탄생할 것 같다. 벌써 김제동 못잖다는 말에 그는 유쾌한 목소리로 이렇게 답했다.
“많은 성원 부탁드립니다!”
김광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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