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추리소설에서 읽은 대사 한 마디가 내겐 강렬했다. "형제가 도움이 필요하다는데 이유를 묻는 사람도 있나?" 그 물음이 말이 되고 힘이 되는 '관계'가 부러웠다.
유럽의 집시 청년인 주인공에겐 범죄자 동생이 있다. 어느 날 갱단 두목이 주인공을 찾아와, 동생이 곤경에 처해 형의 도움을 구하고 있다고 전한다. 주인공은 사연을 묻지만 갱은 저 말 한마디로 청년의 말문을 막는다. 소설에는 주류사회로부터 배척당해온 집시 형제의 과거와 현재가 잘 담겨 있다. 그들에게 가족은 무한책임의 동일체여서, 혈족의 신의에 맞설만한 더 큰 도덕은 없다. 율법 같은 그 신의에, 물리적ㆍ법적 위험 속에, 주인공은 몸을 던진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내 편이 되고 누군가의 편이 될 수 있는 이들과의 일상은 부럽고 멋진 일이다.
신의를 높이 치는 것은 그것이 자주 자신의 희생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이해를 초월한 개체의 신의는 공동체를 결속시키고 신의의 가치를 고양한다. 그리고 공동체는 그 결속의 힘으로 개체에게, 개체로서는 누릴 수 없는 다양한 과실을 선사한다. 관계의 힘은 포옹처럼 아늑하게 개체를 감싸고 또 희생을 요구하면서 공동체의 영속을 꾀한다. 영화 '300'의 미학도 깎은 듯한 근육질의 육체가 아니라 흔들림 없는 밀집 진형, 즉 곁에 선 전우의 청동 방패가 제 허벅지를 지켜줄 것이라는 집단의 신의로 지탱되는 것일지 모른다.
신의는, 저 소설이나 영화처럼 극적이지는 않아도, 심심찮게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한다. 그것이 시험인 까닭은 신의가 정의를 무력화하는 이데올로기로 작동할 때가 잦아서다. 1992년 대선 직전 부산의 한 식당에서 현 대통령 비서실장과 동향의 유력자들이 "우리가 남이가!"하며 뭉쳤을 때 그들은 신의를 앞세워 더 큰 신의, 즉 민주주의를 저버렸다. 우스꽝스러운 신입생 수칙이라는 게 외부에 알려져 비난 받자 반성은커녕 명예를 훼손했다며 발설자를 색출하자는 대학 학생회도 그런 예다. 더 자잘한 일상의 시험들은 굳이 들먹일 필요도 없을 것이다. 나는 국가정보원의 대선 개입이나 간첩 증거조작 사건의 몸통에도, 일부이리라 믿고 싶지만, 조직이나 상급자에 대한 신의의 이데올로기가 실핏줄처럼 퍼져 흘렀으리라 짐작한다. 신의라는 이데올로기의 망토는, 벗겨놓고 보면 유치해 보여도, 두르고 있는 동안에는 당사자를 아늑하게도 비장하게도 만든다.
그래서 신의와 정의(나는 정의를 도덕적으로 옳다고 판단되는 일 정도의 의미로 쓴다)가 맞설 때 정의를 편들기란 쉽지 않다. 신의를 배반한 대가는 즉각적으로 감당해야 하지만, 정의를 택한 보상은 상처뿐인 영광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신의가 유대와 결속의 덕목이라면 정의는 규제와 나눔의 덕목이다. 신의가 따듯한 정의(情誼)에 기댄다면 정의는 서늘한 외로움을 동반할 때가 많다. 정의로 세상이 데워지려면 아주 긴 시간이 걸릴 것 같고, 정말 가능하기는 한 일인가 싶어질 때도 있다. 그래서 내게 정의는 신의보다 무겁고 버겁다.
마크 롤랜즈라는 냉소적인(어쩌면 현실적인) 철학자는 란 책에서 인류의 도덕성은 '신의와 정의의 줄다리기'에 달려있다고 썼다. 그는 인간을 '계산과 계략의 존재'로 규정하고, 도덕성 역시 "서로를 잘 모르고 특별히 좋아하지도 않는 인간들의 관계를 통제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의 판단이 전적으로 옳은진 모르겠으나, 인간은 저마다 매 순간의 판단으로 밧줄의 한 진영과 자리를 택해 서야 하는 건 분명해 보인다. 무심한 구경꾼의 자리, 완벽한 중립의 자리는 거기 없기 때문이다.
해서 나는 저 철학자의 도덕에 대한 문장을 암기해두기로 했다. 어떤 어려운 판단의 순간에 명분으로 주어지는 '신의'와 '정의'를, 혹은 다른 휘황찬란한 가치의 어휘들을 저 문장 앞에 놓아보고 의심해보기 위해서다. 형제가 도움을 청할 때 이유를 따지면 외로워지겠지만, 나는, 그리고 이 사회는, 지금보다는 더 외로워져야 할 것이다. 그건 외로움이 좋아서가 아니다.
최윤필 기획취재부장 proos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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