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정순(1925~2014) 선생의 타계가 계기였다. 김수용 감독의 '어느 여배우의 고백'(1967) DVD는 오랫동안 서재에 묻혀있었다. 강인한 한국의 어머니 또는 온화한 할머니로 인상이 굳어진 원로 여배우의 전혀 다른 일면을 볼 수 있다는 평가에 귀가 솔깃했다.
아흔 문턱에 생을 마감한 여배우는 왕년에 한가락했던 여배우 역할로 이 영화에 자신의 한때를 남겼다. 노배우의 죽음에 이끌려 플레이 버튼을 눌렀는데 호기심은 곧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김진규, 황정순, 남정임, 허장강 등 당대 스타들이 실명으로 연기했고 지방 흥행업자들이 입김을 발휘하던 충무로의 제작 풍토가 그려졌다. 눈이 둥그래졌다.
커졌던 눈은 곧 이야기(물론 허구다)로 이동했다. 불러주는 곳 없는 노배우 김진규는 자신과 사랑을 나누다 요절한 여배우와의 사이에 딸 남정임(그녀는 일찌감치 입양돼 길러준 어머니가 따로 있다)이 있었다는 사실을 20년 만에 알게 된다. 딸을 돌보지 못한 김진규의 죄책감과 뒤늦은 책임감이 남정임을 배우로 이끈다.
13일 개봉하는 캐나다 다큐멘터리 '우리가 들려줄 이야기'(감독 세라 폴리)는 '어느 여배우의 고백'과 닮은 꼴 이야기를 지녔다. 아역스타 출신의 배우 겸 감독인 세라 폴리의 출생 비밀과 어머니 다이앤이 세상을 떠나면서까지 감췄던 뜨거운 사랑이 앞 뒤 바퀴가 돼 영화가 전진한다.
영화 도입부에서 다이앤은 이미 아이가 넷인데다 세라를 마흔 둘에 임신했기에 낙태를 각오한 것으로 묘사된다. 병원으로 향하던 중 다이앤은 마음을 바꾸고, 미래에 캐나다 국민을 열광케 하는 세라가 세상의 빛을 보게 된다. 집안의 유일한 빨강머리였던 세라는 어려서부터 오빠, 언니의 놀림감이었다. "네 진짜 아빠는 아마 다른 사람일거야." 아버지 마이클도 자식들의 우스개에 공감하며 세라를 놀렸다.
처음엔 그저 다이앤을 추억하는 듯했던 영화는 28년 동안 숨겨졌던 진실의 장막을 조금씩 거둬낸다. 세라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생물학적 아버지와 마주하는데 세라를 기른 마이클은 격분해도 될 진실 앞에 담대하다. 그는 세라에게 "네가 너라는 진실은 변하지 않는다"며 딸과의 관계를 여전히 긍정한다(그는 이 다큐멘터리의 내레이션까지 맡았다). '어웨이 프롬 허'(2006)와 '우리도 사랑일까'(2011)로 감독의 재능까지 꽃피운 세라의 현재는 영화제작자인 생물학적 아버지의 유전자와 자유분방했던 다이앤의 기질, 가계를 위해 배우의 꿈을 접고 보험외판원으로 살아온 마이클의 양육이 버무려진 결과물일지 모른다.
다시 '어느 여배우의 고백'. 숱한 편지로 남정임에게 연기 지도를 하고 집까지 마련해준 김진규는 "내가 네 아비다"라는 말 한마디 안(못) 하고 최후를 맞는다. 혼외자식이라는 세간의 손가락질이 스타가 된 딸에게 향할까 두려워서일 것이다. 남정임은 뒤늦게 피 토하듯 아버지를 부른다. 혈연과 가족에 대한 두 영화 속 인물들의 시선은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의 간격만큼 멀고도 멀다.
황정순 선생의 죽음 뒤 유산을 둘러싼 설왕설래가 많다. 앞의 두 영화 속 사연 못지않은 삶을 살았는데 인생의 결말은 영화처럼 애틋하지도 낭만적이지도 않다. 파격적 형식으로 세태를 품은 한국 고전과 빼어난 감성으로 가슴을 뒤흔드는 다큐멘터리를 본 뒤라 그런지 원로 배우가 남긴 인생의 그림자가 어둡고 짙기만 하다.
라제기 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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