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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물 취급받느니 희망퇴직 목돈… 일그러진 임금피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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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물 취급받느니 희망퇴직 목돈… 일그러진 임금피크제

입력
2014.03.10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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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신짝 수모 당하는 기분"경력과 무관한 업무에 배정하고 직간접적으로 퇴사 압력 시달려외환銀, 올 100명 중 9명만 신청"그래도 장점은 있다"실적과 승진 압박 없어 여유… 마음 비우면 은퇴 준비기간 벌어일반-전문직으로 직군 개편… 임금체계 개선작업 병행해야 성공

A은행 박영철(56ㆍ가명)씨는 요즘 하루에 3, 4개 지점을 돌아다닌다. 법규 위반 사항이나 연체 여신에 대한 서류 점검을 하는 게 그의 일이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은행의 꽃'이라는 지점장 자리에 앉아있던 그였다. 만 55세가 되던 올해부터 임금피크제를 선택하면서 생긴 엄청난 변화다. 연봉도 30% 가까이 줄었다. 박씨는 "직장을 계속 다닐 수 있고 전보다 여유는 생겼지만 경력과 무관한 업무에 배정받아 마치 헌신짝 취급을 당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은행권에 임금피크제가 처음 도입된 지 올해로 10년이 됐다. 최근 삼성전자가 정년을 55세에서 60세로 늘려 임금피크제를 도입하기로 하면서 유사한 형태의 은행권 임금피크제 실태에 대해 관심이 높아진 상태. 하지만 애당초 도입 취지가 무색하게 변칙 운용이 되면서 실효성이 크게 떨어진 제도로 전락했다는 지적이 많다.

10일 금융권에 따르면 우리은행이 2005년 은행권에서 임금피크제를 가장 먼저 시행한 이후 하나은행(2006년) 외환은행(2007년) 국민은행(2008년) 등 신한은행을 제외한 주요 시중은행이 이 제도를 도입했다. 이들 은행 대부분은 정년이 만 58세이지만 보통 만 55세 전후로 희망퇴직과 임금피크제 중에서 선택하도록 한다. 2, 3년치 연봉을 미리 받고 퇴직을 할 것인지, 아니면 임금 삭감을 감수하더라도 60세까지 회사를 다닐 것인지 택일하라는 것이다.

문제는 임금피크제를 택하더라도 60세까지 버티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이들은 매년 직간접적으로 퇴사 압력에 시달린다. B은행 임금피크제 2년차인 김명식(57ㆍ가명) 부장은 "최근 만난 본점에 있는 한 인력 담당 후배에게서 내가 물러나면 2, 3명의 신입행원을 채용할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많은 선배들처럼 나도 5년을 채우지 못하고 퇴직을 해야 하는 건지 매 순간 고민하게 된다"고 말했다.

이러다 보니 퇴물 취급을 받는 임금피크제보다 목돈을 챙기는 희망퇴직을 선택하는 이들이 더 많을 수밖에 없다. 외환은행은 올 초 대상자 100여명 중 불과 9명만 임금피크제를 신청한 것으로 전해졌으며, 우리은행의 경우 지난 해 270명이 대상이었지만 100명 가량만이 지원했다.

물론 장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30년간 C은행에서만 일해오다 임금피크제 2년차를 맞은 손희상(56ㆍ가명) 부장은 "마음을 비우고 임금피크제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훌륭한 제도가 될 수도 있다"고 말한다. 은퇴 시기가 5년 늦춰지면서 실적과 승진에 대한 압박 없이 여유를 갖고 은퇴 이후를 대비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임금피크제를 선택할 수 있는 만 55세까지 은행에 남아있는 것조차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전국금융노조 관계자는 "승진이 누락되거나 실적 스트레스 등으로 은행원 대부분은 40대 중후반에 퇴직한다"고 말했다. 때문에 어떻게든 퇴사 시기를 늦춰보려고 아예 승진을 기피하는 현상까지 벌어질 정도다. 실제 한 시중은행에서는 올 1월 인사에서 10여명이 승진을 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임금피크제는 그렇잖아도 과잉 인력에 시달리는 은행 입장에서도 부담일 수밖에 없다. 시중은행 고위 관계자는 "정보기술의 발달로 점포까지 줄이며 상시 구조조정이 현실화 되고 있어, 고연봉의 시니어 층은 아무래도 짐이 되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김우진 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단순한 호봉제 대신 어느 정도 직급까지만 임금이 오르다가 임금피크제로 자연스레 이어지도록 하는 일반직과 성과와 전문성이 커질 경우 임금이 높아지는 전문직으로 대대적인 직군개편과 임금체계 개선작업이 병행돼야 임금피크제가 성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박관규기자 ac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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