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레와 같은 함성소리가 벽을 무너뜨릴 듯하다. "백보람! 김민영! 허민진! 허민선! 박혜경! 크레용팝 빠빠빠!" 목소리의 주인공들은 지난해 '빠빠빠'라는 노래로 길거리 가수에서 일약 스타로 떠오른 걸그룹 크레용팝의 열혈 아저씨 팬, 이른바 '팝저씨'들이다. 그러나 번쩍번쩍한 조명이 돌아가는 무대 위는 텅 비어 있다. 무대가 놓인 곳은 방송국이 아닌 정연두 작가의 전시 '무겁거나, 혹은 가볍거나'가 열리고 있는 플라토 미술관이다.
이번 전시는 작가가 국내에서 6년 만에 선보이는 개인전이다. 2007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에 최연소로 선정된 데 이어 2012년 미국 아트앤옥션의 '가장 소장 가치 있는 작가 50인'에 이름을 올리며, 가장 주목 받는 국내 작가 중 한 명으로 떠오른 그는 왜 팝저씨에 주목했을까.
작가가 처음 팝저씨들을 발견한 것은 지난해 봄 무렵이다. 시청 앞에서 열린 크레용팝의 공연에 어김없이 출동해 일사불란한 응원을 펼치는 팝저씨들의 모습에 작가는 그만 전율하고 말았다. "이 30~40대라는 세대가 참 재미있는 것이 사회에서 조직의 쓴맛이랄까, 사회의 체계 속에서 성공하는 것이 그다지 쉽지 않다는 것을 충분히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어찌 보면 평범한 외모에 '추리닝'을 입은 다섯 명의 여자 멤버들이 공연할 곳이 없어서 거리를 전전하며 성공에 대한 열망을 다지고 있는 모습을 30~40대 아저씨들은 어떤 감정으로 바라보았을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작가는 전시장에 오직 크레용팝만을 위한 전용 무대를 설치하고 팬들을 불러 모아 응원하는 모습을 영상에 담았다. 팝저씨들의 열정은 실로 대단해 어떤 이는 울산에서, 어떤 이는 마산에서 비행기로 날아왔다. 50여명의 팬들이 추리닝, 일명 '팝복'을 입고 빠빠빠에 맞춰 온 힘을 다해 내지르는 응원은, 단순히 대형 기획사에 들어가지 못한 B급 아이돌을 향한 연민이 아니다. 아마도 평생 성공의 단물을 맛보지 못할 청년들, 또는 이미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져버린 중장년에게 팝저씨들의 우렁찬 함성은 어떤 간지러운 위로보다 명약한 치료제다.
전시에는 정연두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온기'의 근원을 짐작할 수 있는 초기작과 대표작도 함께 나왔다. 1998년작인 '영웅'은 신도시의 도로를 질주하는 중국집 배달부를 찍은 것이다. 소년 가장으로 힘든 삶을 이어가는 그는 오토바이 위에서만은 영화 속 슈퍼 영웅 못지 않게 날렵하고 자유롭다. 2001년작인 '상록타워'는 서울 동부의 임대 아파트 상록타워에 사는 32세대의 모습을 담았다. '예술가가 가족 사진을 찍어드립니다'라는 홍보에 기꺼이 대문을 연 이들은 깨끗하게 정돈된 거실에서 단란한 포즈로 카메라 앞에 선다. 그들이 스스로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가정의 모습은 놀라울 정도로 비슷해 - 거실에 전시된 트로피, 고풍스런 양탄자, 벽에 걸린 결혼식 사진과 아이의 돌 사진 - 다소 기이한 느낌까지 들지만, 그 소시민적 발상과 취향에 애잔한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다.
'별 볼 일 없는 이들의 꿈'이라는 변치 않는 주제에 대해 작가는 10일 간담회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비리비리한 예술가가 누구의 꿈을 이뤄줄 수 있을까요. 제가 하는 것은 제스처뿐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예술에 관대해요. 예술가라고 하면 거리낌 없이 집 안으로 들이고 돌발 행동도 이해하려고 합니다. 내가 누군가의 꿈을 이뤄주려는 마음으로 이런 작업을 한다기보다 사람들이 예술에 대해 갖고 있는 관대함, 예술과 소통하는 방식을 주목하는 것뿐입니다." 전시는 6월 8일까지.
황수현기자 so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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