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융사 28년 근무 54세 고영표씨국민연금 받기까지 5년 공백 부담호적이라도 바꿔 보라고 하는데할 수 있다면 그렇게라도 하고 싶어● 공기업서 32년, 58세 김동오씨부모님 모시고 자식들 키우며앞만 보고 달려 왔는데 까마득임금피크제 도입 삼성전자 부럽기만● 회사도 노조도 정부도 무관심사측, 인건비 상승 이유 구제 소극적노조는 임금 깎는 피크제 거부정부 고용연장 지원책 기업 외면
"내년 12월29일이 정년 퇴직입니다. 3일만 늦게 태어났더라면 회사 생활 이 5년 더 길어졌겠죠. 주변에선 우스개 소리로 호적이라도 바꿔보라고 해요. 사실 자식들 결혼준비도 그렇고 내 노후도 그렇고…. 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라도 하고 싶어요."
국내 한 대형 금융회사에서 28년 째 근무 중인 고영표(54ㆍ가명)씨는 정년퇴임을 한 해 앞두고 마음이 답답하다고 했다. 지난해 4월 국회에서 정년연장법이 통과돼 2년후(2016년)부터는 대기업과 공공기관에선 정년이 60세로 늘어나지만, 정작 자신만 이 혜택을 보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억울하다는 생각도 든다고 했다.
고씨가 다니는 회사의 현재 정년은 55세다. 1960년생인 그는 내년에 55세가 돼 회사를 그만둬야 한다. 그의 말대로 사흘만 늦게 태어났더라면 2016년부터 적용되는 정년연장 혜택을 받아 2021년까지 회사를 다닐 수 있다. 말 그대로 단 사흘의 시차가 노후 5년의 좌우하게 된 것이다.
정년연장법 시행이 2년 앞으로 다가오면서 가장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직장인들은 고씨처럼 정년을 코 앞에 둔, 연장혜택을 받지 못하는 이른바 '낀 세대'들이다. '낀 세대'의 연령층은 다니는 회사의 현재 정년에 따라 57년~60년생까지 다양하다. 예컨대 고씨처럼 55세 정년인 회사일 경우, 61년생부터 정년연장 혜택을 받기 때문에 60년생이 가장 억울하다. 58세 정년인 회사에선 57년생이 안타깝게도 회사를 그만둬야 한다.
최근 삼성전자는 이런 그룹들을 위해 선제적 정년연장조치를 취하면서, 다른 '낀 세대'들의 부러움을 샀다. 삼성전자는 현재 55세 정년을 채택하고 있는데, 임금피크제를 도입하는 형식으로 사실상 올해부터 정년을 60세로 늘리기로 한 것이다. 이 조치로 올해와 내년에 회사를 그만둬야 할 59~60년생들은 매년 임금을 10%씩 덜 받는 조건으로 회사를 60세까지 다닐 수 있게 됐다.
'낀 세대'들은 10%가 아니라 그 이상 삭감이라도, 회사를 오래 다닐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감수할 의향이 있다고 했다. 한 공기업에서 32년째 근무하고 있는 김동오씨(58ㆍ가명)은 올 9월 정년을 맞는데, 삼성전자의 조치가 한없이 부럽다고 했다.
그는 "다른 베이비붐 세대처럼 나 역시도 앞만 보며 달려왔다. 보릿고개가 있던 시절에 태어나 자랐고, 직장에 취직한 뒤로도 부모봉양에, 내 집 마련에, 애들 교육에만 매달렸다. 정작 나 자신의 노후에 대해선 아무것도 준비한 게 없고 아이들 결혼도 아직 못 시켰는데, 당장 내년에 회사를 그만 둬야 한다는 사실이 막막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게다가 정년연장 혜택이 내 앞에서 끊어진다고 하니 서글프기까지 하다"고 했다.
'낀 세대'들은 당장 '소득절벽'을 경험해야 한다. 고영표 씨도 그런 경우다. 연봉 1억원 안팎에다 대형 금융기관에 다니면서 비교적 노후설계를 꼼꼼히 한 편이지만, 퇴직 후 국민연금이 지급되는 61세까지 5년의 소득공백은 상당한 부담이다. 그는 "애초 계획한 월 147만원의 연금을 받으려면 남은 기간 약 3,000만원을 더 내야 하는데 현재 재취업 자리가 마땅히 보이질 않아 연금을 제대로 납부할 수 있을지 걱정"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우리회사도 삼성전자처럼 임금피크를 전제로 정년을 연장하면 어떻게 될까 생각해봤다. 계산해봤더니 매년 10%씩 연봉이 깎여도 5년 간 약 3억6,000만원을 더 벌 수 있겠더라. 그러면 연금보험료 걱정도 없을 텐데, 그저 부럽기만 하다"고 말했다.
현재 이들에 대해선 회사나 노조, 정부도 큰 관심을 두고 있지 않다. 사측이야 2016년 정년연장도 인건비상승을 이유로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는데, 몇 안 되는 '낀 세대'를 위해 미리 정년을 늘릴 가능성은 전무하다. 현실적으로 정년연장이 성사되려면 임금피크제가 전제되어야 하는데, 노조 역시 스스로 급여를 깎는 임금피크제를 먼저 요구하기란 쉽지 않다.
고용노동부는 지난해 '낀 세대'를 위해 고령자를 계속 고용하는 기업에 주는 '고용연장지원금'대상을 55세 사업장으로 낮추고, 고용 연장 대신 임금이 깎인 근로자에게 주는 임금피크제 지원금도 55세 이상 퇴직자로 확대하는 조치를 내놓았다. 하지만 기업의 참여가 워낙 미미해 실효성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다.
이들은 그저 답답함을 참은 채, 냉가슴만 앓고 있다. 김동오씨는 누구에겐가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지만 그럴 분위기도 아니라고 했다. "한번 생각해보세요. 신입사원도 제대로 뽑지 못하고, 승진도 계속 늦어져 마치 우리가 후배들 앞길을 막는다는 듯한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눈치가 보여서라도 계속 다니고 싶다고 말 못해요. 그냥 이대로 있다가 나가는 수 밖에 없죠."
김현수기자 ddacku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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