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 이륙 50분 만에 탑승자 239명과 함께 해상에 추락한 말레이시아항공 여객기의 사고원인을 둘러싸고 의문이 증폭되고 있다. 1만m 상공에서 순항하던 여객기가 구조신호도 없이 갑자기 실종된 이례적인 항공 사고이기 때문이다. 기체 결함, 조종사 실수 등 여러 가설 속에 동남아시아 각국과 중국, 미국은 사고원인 규명의 단서가 될 잔해 수거 및 실종자 수색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말레이시아 당국이 9일 "최소 4명의 탑승객이 위조여권을 소지한 사실을 확인하고 국제 공조수사를 진행 중"이라고 밝히면서 테러로 인한 사고 가능성에 급속히 무게가 실리고 있다.
"돌발상황이 벌어졌을 것"
말레이시아 당국에 따르면 사고기인 MH370편(기종 보잉 777-200)과 말레이시아 항공관제소의 교신이 끊긴 시간은 8일 오전 1시30분. 말레이시아 수도 쿠알라룸푸르의 수방공항을 이륙한 지 50분 만이다. 아자루딘 압둘 라흐만 민간항공청장은 "기장이 이상이 있다고 알리거나 구조신호를 보낸 바 없다"고 말했다. 미국 온라인 항공기추적 서비스업체 플라이트레이더24는 이보다 10분 앞서 MH370편이 레이더에서 사라졌다고 주장했다. 이 업체에 따르면 사고기는 실종 직전 1만668m 상공에서 시속 874㎞로 정상 운항하고 있었다.
어떠한 전조도 없이 관제망을 벗어난 사고기의 소재를 파악한 곳은 인접국 베트남이었다. 베트남 당국은 이날 자국 남서부 해역에서 사고기로부터 나오는 신호를 감지한 데 이어 사고기 연료와 동일한 종류의 기름띠 두 개를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기름띠 발견 장소는 태국만(灣)의 베트남과 말레이시아 영해 경계지역이다. 앞서 베트남 공군은 MH370편과의 교신이 자국 영공으로 진입하기 직전인 오전 1시20분쯤 끊겼다고 밝혔다.
상황을 종합하면 관제시스템 안에서 정상적으로 운항되던 여객기가 모종의 돌발 상황을 맞아 추락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AP통신은 전문가들을 인용해 "승무원이 구조신호를 보내지 못했다는 것은 급작스럽고 돌발적인 일이 벌어졌을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진단했다.
기체 결함 가능성 높지 않아
전례에 비춰볼 때 기장이 구조신호를 보내기 어려울 만큼 긴박한 사고로는 기내 폭발, 조종실 점거 등 테러 상황이나 기체 결함, 이상기류, 조종사 과실 등이 꼽힌다.
이 중 기체 결함에 의한 사고 가능성은 다소 낮다는 분석이 나온다. 사고 발생으로 이어질 만큼 심각한 기체 이상은 대부분 동체에 가해지는 압력이 급격하게 변화하는 이착륙 때 발생하기 때문이다. 보잉의 집계에 따르면 이번처럼 여객기가 높은 고도에 진입한 이후 기체 결함이 발생하는 사고는 전체의 9%에 불과하다. 말레이시아항공 측이 "1만m 상공을 비행하고 있었다면 항공기 자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봐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이런 이유다.
사고기와 같은 계열인 보잉 777기가 2008년 영국에서 엔진 두 개가 모두 꺼져 착륙 사고를 냈던 일을 들어 엔진 고장 가능성도 제기된다. 그러나 극히 드문 사례인 데다 설령 두 엔진이 모두 고장나도 최장 20분 동안 날 수 있어 기장이 구조신호를 보낼 수 있다는 반론이 나온다. 사고 기종인 보잉 777-200은 역대 항공기 중 가장 안정적인 모델이기도 하다. 1995년부터 상업비행에 투입된 이 기종이 인명사망 사고를 일으킨 것은 지난해 아시아나항공 여객기가 미국 샌프란시스코 국제공항에서 착륙 사고를 일으켜 3명이 사망한 것이 유일하다. 말레이시아공항 측은 "열흘 전 기체를 점검했을 때도 양호한 상태였다"며 결함 가능성을 일축했다.
조종사가 자동항법장치를 끈 채로 운항하는 실수를 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그러나 이런 문제는 레이더를 통해 금방 포착되는 데다가 자동항법장치를 꺼도 5,000㎞ 가까이 비행할 수 있다는 점에서 구조신호도 없이 추락한 이번 사고와는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온다. 게다가 사고기 조종을 맡은 자하리 아흐마드 샤(53) 기장은 1981년 말레이시아항공에 입사해 1만8,000여시간의 비행경력을 지닌 베테랑이다. 이상기류 설 역시 비행 당시 기상이 양호했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떨어진다.
물론 최종적인 사고 원인 규명은 블랙박스를 비롯한 기체 잔해를 수거하고 분석해야 가능하다. 블랙박스 인양에는 통상 수개월이 소요되지만 사고기 추락 지점인 태국만은 비교적 수심이 얕은 해역이어서 신속한 수거가 가능하다는 견해도 있다.
말레이 당국 "테러 가능성 수사"
이런 가운데 말레이시아 정부는 테러로 인한 사고 가능성을 언급하며 수사에 나섰다. 히샤무딘 후세인 교통장관은 9일 "사고기 탑승자 4명이 도난 여권을 사용한 사실이 확인됐다"며 "미국 연방수사국(FBI) 등 국제기관들이 수사를 지원하고 있다"고 밝혔다. 말레이시아 정보기관과 대테러기관들도 수사에 대거 동원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사법당국 관계자는 "FBI가 비행기표 발권 장면이 담긴 쿠알라룸푸르 공항 내부영상을 분석, 승객과 테러단체 조직원을 대조하는 작업을 도울 것"이라고 밝혔다.
앞서 외신들은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 국적자의 도난 여권을 소지한 이들이 사고기에 탑승했다고 보도했다. 이에 따르면 이탈리아인은 지난해 8월, 오스트리아인은 2년 전 각각 태국에서 여권을 도난 당했고, 이탈리아인의 도난 신고는 국제형사경찰기구(인터폴)에 접수된 상태다. 말레이시아 당국이 언급한 4명의 혐의자 중엔 이들의 여권을 소지한 이들도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여권 소지자들이 테러 계획과 무관하게 여권을 훔쳤거나 암시장에서 구입했을 가능성도 있다.
여객기 테러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배후에 대한 추측도 분분하다. 일각에서는 사고기 탑승객 다수가 중국인이라는 점을 들어 중국 신장위구르자치구 무장세력의 테러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중국으로부터 분리독립을 추구하는 이들은 올해 1월 자치구 내 공안과 유혈충돌한 데 이어 이달 초 윈난성 쿤밍역에서 무차별 칼부림으로 33명을 살해하는 등 테러 수위를 높이고 있다. 위구르인들은 지난해 두 차례 항공기 납치를 시도한 적도 있다. 이와 관련해 도난 여권을 소지한 이들은 중국 남방항공을 통해 항공권을 구매했다는 보도도 나오고 있다.
말레이시아항공은 기장이 구조신호를 보내지 않은 정황을 들어 사고 직후부터 테러 가능성을 제기해왔다. 1977년 이 항공사 소속 여객기가 추락해 100명이 사망한 사건도 괴한의 조종석 침입으로 발생했다. 말레이시아 공군이 밝힌 사고기의 항로 수정 시도도 테러 가능성과 관련해 주목된다.
한편 이번 사건으로 말레이시아의 허술한 출입국 관리가 도마에 오르고 있다. 유럽연합 관계자는 "도난 여권으로 공항에서 탑승 수속을 밟았다는 사실이 충격적"이라고 비난했다. 뉴욕타임스는 "말레이시아는 수십년 동안 테러 대상국이 된 적은 없었어도 느슨한 비자제도 탓에 테러리스트 등 범법자들이 자유롭게 드나들었던 국가"라고 지적했다. 예컨대 미국 본토를 겨냥한 9ㆍ11테러도 일부 준비 과정이 말레이시아에서 이뤄졌고 2002년 인도네시아 발리 폭탄테러 주범이 말레이시아인이라는 것이다.
이훈성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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