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들이 1998년 외환위기 때 금 모으기에 나섰다는 일화를 듣고, 현재 외환위기 상황에 처한 우크라이나 국민들에게 '금 모으기 운동을 벌인다면 동참할 것인가'라는 설문조사를 했는데 긍정적 응답이 고작 1.2% 였습니다."
우크라이나 키예프를 방문했던 2009년 겨울. 현지 유력 시사주간지 부국장은 기자에게 이런 얘기를 했다. 당시는 오렌지혁명을 통해 들어선 이른바 '민주정부' 임기 막바지로 한창 대선정국이었다. 부정선거를 저질러 민주화 혁명의 단초를 제공하고 쫓겨난 빅토르 야누코비치 전 총리(현 대통령)가 단연 선두를 달리고 있었다. 우크라이나 사상 최초로 자유선거를 통해 수립된 정권도 과거 못지 않게 부패했기 때문이다.
결국 야누코비치는 대통령이 돼 1,000억원을 들여 호화저택을 짓는 등 과거 총리 때보다 더 노골적으로 부패한 통치술을 보여줬고, 지난달 다시 시위대에 의해 쫓겨났다. 하지만 시민들이 피 흘리며 이룬 또 한번의 민주화 혁명 현장에 야누코비치와 우열을 가르기 힘들 정도로 부패한 정치를 했던 율리아 티모센코 전 총리가 마치 자신의 승리인 듯 등장해 우크라이나 사람들을 다시 절망에 빠뜨렸다. 이런 정권 밑에서 어떤 국민이 나라를 구하기 위해 벽장 속 금을 꺼내겠는가.
최근 우크라이나 사태를 지켜보며 민주주의의 한계와 무능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영국 주간 '이코노미스트'최근호는 "1980, 90년대 거침없이 확장되던 민주화 물결이 2000년대 이후 퇴조하는 기색이 역력하다"며 그 분수령으로 우크라이나를 거론했다. 오렌지 혁명부터 터키와 최근 아랍의 봄까지 2000년대 들어 민주화 운동은 독재정권을 몰아내고 자유선거제 도입에 성공했지만, 그렇게 들어선 정부도 여전히 억압적이고 착취적이어서 민주화에 대한 환멸이 커지고 있다는 진단이다.
잡지는 민주화 퇴조의 이유 중 하나로 '중국의 성장'을 들었다. 중국의 권위주의 정권은 고속성장을 효율적으로 지휘하고 있다. 또 고도성장에 따른 각종 사회문제에도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 점 때문에 신흥국들 사이에서 서구 민주주의를 대체할 성장모델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반면 민주화 선진국이라는 미국 정부는 양당간 극한 대립 속에 허우적거리는 모습이다. 더욱이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이라크를 침공하면서 "자유와 민주주의 전파하겠다"고 명분을 내세우는 바람에 민주주의를 '미국 제국주의의 가면'정도로 여기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는 지경이다.
민주화 퇴조는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던 과거 개발독재 시절에 대해 향수를 느끼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우리도 비효율적인 민주적 가치를 축소하고, 권위주의적 요소를 늘리는 것이 정체에 빠진 우리 경제를 되살리는 길일 것인가. 적어도 현 정부 수뇌부 중 몇몇은 이런 생각을 하는 듯 하다. 청와대는 부처에 시시콜콜 지시를 하고, 장관은 받아 적기에 바쁘다. 이 과정에서 이견이 나오면 '기득권의 저항'으로 간주돼 철퇴를 맞는다.
하지만 이는 위험한 발상이다. 정부가 경제혁신 3개년 계획을 발표하며 약속한 '1인당 국민소득 4만달러'에 이미 도달한 국가들을 보면 일부 산유국을 제외하고는 모두 오래 전부터 민주적 정치체제를 갖추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선두주자를 쫓아가면 되는 중진국 단계까지는 권위주의적 시스템이 효율적일 수 있다. 하지만 선진국으로 도약하려면 '남들과 다른 발상'이 필수적이며 이는 권위주의적 환경에서 발현되기 힘들다. 민주적 의사결정은 비효율적으로 보이지만 참신한 해결책을 얻는 최선의 방책이다.
'이코노미스트'는 신생 민주정부가 실패하는 이유를 시민의식의 미성숙과 함께 정부가 소수의견을 배척하는 다수결주의(majoritarianism)에 빠져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우리나라의 민주주의 체제가 위기에 처해 있다면 그 원인은 정부가 다수결주의의 유혹을 극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시민의식이야 나라가 위급한 순간 개인의 이익보다 공공의 선을 우선시한다는 면에서 우크라이나가 부러워할 수준 아닌가.
정영오 경제부장 young5@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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