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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병욱의 쪽빛보다 푸르게] <26> '극단 76'의 기국서-기주봉 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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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병욱의 쪽빛보다 푸르게] <26> '극단 76'의 기국서-기주봉 형제

입력
2014.03.09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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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관객모독' 초연 땐객석서 의자 날아와 도망쳐 가며답답한 시대 속 일탈·해방감 맛봐공연시점 한국상황 맞게 버전업한군데 안착 않겠다는 강한 의지작년 '햄릿6'로 쌍용차 해직자 등우리 사회의 폭력성 폭로했지만관객 무덤덤… 풍자시대 종말 감지"

집 한 켠에 쟁여져 있는 헌책 뭉치 어딘가에 기국서(62, 연출ㆍ극작)씨와 그의 극단 76이 생생히 보존돼 있을 것이라는 감은 옳았다. 월간지 '뿌리 깊은 나무' 1979년 2월호 중 평론가 이상일이 쓴 연극 비평 속에 있었다. "극단 76은 미숙하긴 하지만 연극의 의식을 날카롭게 하고 새로운 작업에 골몰하는 젊은 소극장 운동을 대표한다." 그 정신이 살아있어 30여 년이라는 시간의 벽은 무의미하다.

그는 여전히 후배들과 부대끼며 작업 중이다. 가장 든든한 연극 동지인 동생 기주봉(59ㆍ배우)씨도 미리 나와 연습장을 달군다. 때가 되면 10명의 후배 단원들과 인근 밥집에 가서 속을 든든히 채운 뒤 또 연습이다.

세상에는 두 가지의 '관객모독'이 있다. 독일 극작가 페터 한트케가 1966년에 빌표한 희곡과, 기국서, 주봉 형제가 주축이 돼 1978년 이후 계속 해 온 한국형 연극. 이 형제의 '모독'은 언제나 상연 당시 정황과 직결된, 문자 그대로 인터랙티브다. 이번의 버전 업은 이런 식이다.

"조국 통일의 가장 극악무도한 원쑤인 청와대 역적 패당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습니다. xxx(남한 정치 거물의 이름)이 생쥐 새끼야!" 대남 방송으로 귀에 익은 북한 아나운서의 패러디다. 기주봉 씨, 이번에는 심리학자로 돌변한다."우리가 여러분에게 말을 걸기 때문에 여러분은 자의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후략)" 공연 시점의 한국 상황을 텍스트 안에 녹여 넣는 작업 방식은 번역자인 양혜숙(75)씨의 동의 아래 쭉 이어져 온 관행이다. 무대 위의 상황은 교양도, 체면도 보란 듯 내던지고 진행된다.

한트케도 극단76의 선택에 동의할 것이다. 네 명의 절묘한 연기 앙상블은 물론, 그들의 호흡을 총괄하는 사령탑 기국서 씨는 "연극적인 연극"이라 일축한다. 그 말은 '연극적이지 않은 연극'이 범람하는 현실의 뒤통수를 겨누고 있다. 같은 제목의 작품을 올리되 재탕 하지는 않겠다는 자존심도 번뜩이는 말이다. 한 군데 안착하지 않겠다는 정신이다.

사령탑 격인 형제를 보자. 국서 씨는 단막극장, 76스튜디오, 남산예술센터, 혜화동1번지 등지를 돌며 작품을 계속하고 있다.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햄릿' 시리즈의 버전 업 작업은 물론 이오네스코의 '의자들'을 용산 사태로 해석해 낸 '용산 의자들' 등으로 그는 끊임없이 발언해 왔다. 한편 주봉 씨는 TV 드라마(SBS TV의 '올인' 등), 영화('공동 경비 구역''친구2'등)에서 꾸준히 일반과 접촉하고 있다. 이들이 벌여 온 일련의 협업 중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역시 '관객 모독'이다.

"초연 때는 센세이션에 의존한 게 사실이다." 국서 씨는 그것이 답답한 시대상황 속에서 묘한 피학적 쾌감마저 야기했다고 본다. 물을 흩뿌려대는 배우들의 '모욕'에 난리를 피우던 관객들은 일탈과 해방감이란 보상을 받았던 것이다. 급기야 객석에서 의자가 날아와 유리창이 깨졌고 배우들은 도망 갔다.

"그러나 그마저도 형식으로 굳어지다 보니 요즘 관객은 무대 상황을 즐기게 됐죠. 무대로부터 날아 온 욕을 되받아 치며 유쾌해들 하죠."이제 모든 상황이 총체적인 연극성을 상징하게 된 것이다. 텍스트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멈추지 않는 연출자 덕에 '한국형 관객 모독'이 이어져 오고 있다. 그 뒤안길로 가 보자.

하필 1979년 10월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 바로 다음 날, 이화여대 앞 76소극장에서 초연됐다. 한국 재즈의 메카였던 박성연씨의 야누스가 바로 극장 윗층에 있었다. 10월 27일 집집마다 내걸린 조기를 보게 된 그는 처음에는 부산ㆍ마산 사람들이 청와대를 습격해서 벌어진 일로 생각했을 정도로 연극에 파묻혀 살고 있었다. 8일간이나 전국의 유흥업소는 물론 극장까지 폐쇄됐던 당시, 그는 '나라가 국민에게 끼친 손해, 언젠가는 받아야지'라며 별난 생각을 하던 연극쟁이였다.

8일 후 막은 올랐다. 아직 일본서도 못 올라간 작품은 요즘 말로 대박이었다. 자리 없어 돌아간 사람들이 부지기수였을 정도니. 이화여대 독문과 양혜숙 교수가 번역한 희곡을 발견하고 가슴 뛰었던 데는 분명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초연 당시 포스터 사진에서 입이 찢어져라 악 쓰던 인물이 바로 기주봉 씨였다.

두 사람은 평생 동지다. 예전에 그들을 다룰 때 언론에서 흔히 쓰던 관용구가 "형제는 용감했다"다. 경우에 따라 배우로 나서기도 했던 형 국서 씨는 "세월이 흐르면서 쟁이로서, 예술가로서 각자가 (자신의 역할에 대해)깊어짐을 느낀다"고 했다. 나아가 "이제는 연극인으로서의 긍지란 것도 생겼다"고도 했다. 연극계 일반과 버성겼던 세월을 깔고 하는 말이다.

그는 기존 연극계의 보수성과 타협하지 못해 이방인처럼 겉돌았다. 나아가 그 같은 이미지가 낙인으로 작용하면서 언젠가부터 자신을 옥죄는 족쇄처럼 그를 속박하기 시작했다. 그의 말을 빌면 "특성이란 만드는 게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용케 기회가 닿아 갔던 파리에서 그는 부조리 연극의 거장 사뮈엘 베케트의 묘지를 찾았다. "위대한 작가라기보다는 아는 형을 찾은 느낌이었어요." 독일에서 사회주의적 서사극의 태두 브레히트의 작품을 관람하고는 "좋은 연극 선배"라 느꼈던 것과 유사한 이치다. 브레히트의 위대한 이론인 '소외 효과'라는 것도 냉정한 독일 관객을 웃겨보려는 나름의 시도였다는 깨달음도 뒤따랐다. 문제는 한국에서 연극 하기였다.

제 아무리 위대하다는 원작도 그대로 했다가는 관객들이 몇 분도 못 참고 나갈 게 뻔한데, 붙들어 두는 묘책으로 생각해 낸 것이 흥겨움이었다. 띄어 읽기 같은 통상적 언어 관습을 해체하거나 비논리적 극중극을 삽입시키는 등의 극히 한국적인 연극 유희였디. 그는 여전히 자신은 제대로 이해되지 못하고 있다고 여기는 듯 하다. "자금까지 벌여 온 그런 실험들이 타당했는지 냉정히 검증 받고 싶다. 해외 공연의 기회가 몹시 아쉽다"라는 말을 했다.

형은 1973년 중앙대 국문과에 입학, 각 대학 문리대 연극반을 모아 사랑의 배라는 뜻의 '애쥡(愛ship)'을 만들어 연극의 길로 접어 들었다. 1976년 그는 기주봉, 김태원(현재 무용 평론가)등과 함께 경기고 출신 중심으로 76단을 조직, 난해한 현대극을 과감히 공연해 갔다. 동생은 1985년 형의 '리어왕'에서 타이틀 롤로 참여했다. 미쳐가는 노인의 광기를 절절히 표현한 그에게 찬사를 안겨준 작품이다. 다섯 살 때, 부친이 좋아하던 '죽장에 삿갓 쓰고'를 불러 어린 스타가 되더니 기질을 이어가 서라벌예대에서 이원경 등 대가들을 사부로 모셨던 동생이다. "시는 20대, 소설은 30대, 희곡은 40대, 수필은 50대"라는 말이 문청(문학 청년)들 사이에 유포돼 있던 때였다.

신진 연출가 5명이 벌인 5편의 창작극 시리즈 '한판 팔고'로 전위적인 소극장 창작극 페스티벌의 효시가 되기도 했던 76단은 그러나 1980년 5월 재정난으로 극장 문을 닫아야 했다. 그러나 1년 뒤 국립극장소극장에서 '기국서의 햄릿'을 공연, 일련의 햄릿 시리즈는 빛을 보게 된다. 개인의 이름을 작품명에 내건 것은 당시로서는 신선한 시도였다.

"당시 내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던 박정희 대통령 시역과 광주 항쟁 등의 영향으로, '햄릿'을 삼촌의 쿠데타라는 관점에서 다시 짠 거죠." 시대를 이야기하되, 검열에 통과 하려 셰익스피어라는 고전을 앞세운 것. 시대 상황을 읽은 연극쟁이의 본능 혹은 헤겔식으로 말하면 간지(奸智)였다. 뒤집힌 현재의 왕을 햄릿의 벗 호레이쇼가 찔러 죽인다는 극중 상황이 김재규의 시해를 상징한다는 사실을 검열관이 읽어내기에는 무리였을까. 막판 대혼돈 상황에 펼쳐진 신중현의 '아름다운 강산'은 시대에 대한 절망적 야유였다.

지난 해 남산예술극장에서 공연했던 '햄릿6'에서는 경찰의 폭력적 진압으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리는 쌍용자동차 해직자(햄릿), 젊은 창녀(오필리어) 등이 우리 현대사의 폭력성을 폭로했다. 그러나 시대는 표변해 있었다."국가가 자본에 의해 사유화되는 것 같아 불쾌했고, (그 사실을)연극적으로 형상화했는데 당시 관객들은 무덤덤하더군요." 풍자의 시대는 지났다는 걸 그제서야 감지했다. 동시에 76단도 시효 만료되는 느낌이었다. "76단이요? 이제 난파선 같은 극단이죠."

그러나 저 말에 냉소는 없다. 76단 특유의 자유스런 분위기가 없었다면 박근형, 김낙형이라는 현재 연극판의 기수들도 없었을 테니까. 그들과의 술자리도, 공동 작업도. 지금 그의 마음속에는 "무지 웃기는 풍속극 한 편"이 뮤지컬 형식으로 자리 잡았다.

기자는 '관객 모독' 막바지 연습 중인 아트원씨어터극장에서 긴 담소를 끝낸 뒤 형제의 권유에 못 이기는 척, 인근 밥집에서 식사를 함께 했다. 소주 맛이 썩 괜찮은 자리였다.

장병욱 선임기자 a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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