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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비평 거장이 겪은 홀로코스트 그 가슴 아픈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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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비평 거장이 겪은 홀로코스트 그 가슴 아픈 삶

입력
2014.03.07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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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출간이 뉴스가 되는 책들이 있다. 지난해 93세로 작고한 독일의 문학평론가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의 자서전이 그런 책이다. 2002년 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돼 몇 년 되지 않아 절판됐던 책이 으로 10여 년 만에 다시 나왔다.

자서전 집필 자격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역사를 증언하는 삶의 이력, 탁월한 성취 등의 순으로 기술될 것이다. 홀로코스트 생존자이자 '문학의 교황'으로 불릴 만큼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그의 비평작업은 이 둘의 자격을 '또는'이 아니라 '그리고'의 자격으로 만족시킨다. 그것도 퍽 감동적으로.

책은 폴란드 유대인으로 태어나 아홉 살 무렵 독일 베를린으로 이주한 그가 제3제국의 유대인 탄압에 의해 대학 입학을 거부당하고 폴란드로 강제 추방당한 뒤 게토에 수용돼 겪은 고난의 역사를 1, 2부에 담고 있다. 독일의 야만성에 대한 원초적 두려움과, 독일 문학과 음악에 대한 황홀한 사랑이 복합적으로 뒤엉킨 시기이자, 문학 책을 통해서만 해박했던 성과 사랑에 실질적으로 눈을 뜬 시기이며, 열 아홉 소녀로 만나 70년 넘게 함께 산 아내와 게토에서 극적으로 탈출하기까지의 강렬하고도 가슴 아픈 이야기다. "게토 경계선의 유대인 사냥꾼들은 정확하게 유대인을 식별해냈다. 무엇을 보고 알아낼까? 다른 특징이 없으면 슬픈 눈을 보고 알아낸다고 했다." 슬픈 눈의 유대인들은 죽음의 공포를 사랑의 온기로 버텨냈고, 라이히라니츠키에게 그 사랑은 아내와 가족만이 아니었다. "나를 내쫓은 나라를 떠날 때 가지고 나온 것은 바로 언어였다. 그리고 문학이었다. 그건 독일어였고, 독일문학이었다."

3~5부는 간결하고 직설적인 언어로 문학작품에 가차없는 '평결'을 내려온,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문학평론가가 되기까지의 이력을 그린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귄터 그라스를 비롯해 수많은 작가들의 적이었으면서도 문단에서 거의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했던 이 평론가는 자서전에서도 솔직하고 위트 넘치는 민낯의 고백들을 쏟아낸다. 일간지 디차이트와 프랑크푸르터알게마이네차이퉁에서 문예면 담당자로, 공영방송 ZDF의 책 프로그램 '문학 4중주'의 진행자로 일하며 40년간 8만권을 비평했지만 그의 장례식에는 독일 작가들이 거의 오지 않았다.

그의 저서 이 너무 강하게 인식돼 뒤에 쓴 은 기억하는 이도 별로 없다는 푸념, "그럴 가치가 없는 책들에 너무 자주 찬사를 보내는 건 아닐까 혼란스러워 했다"는 해명, 그러면서도 "일반적으로 작가에게 '좋은' 비평이란 그를 칭찬하거나 그의 적수를 혹평하는 비평이고, '나쁜' 비평이란 그를 꾸짖거나 그의 적수를 칭찬하는 비평"이라는 죄르지 루카치의 말을 인용한다. 비평은 작가가 아니라 독자를 위해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학의 사형집행인'이라는 세간의 평가는 "'적의 증오는 내가 썩 괜찮게 일을 한다는 보증'이라는 하이네의 말로 위안을 삼아야 할 정도로 고통스러운 것"이었다고 털어놓는다.

키득키득 웃다가 돌연 뭉클해지고 뭉클했다가 다시 키득거리게 되는 이 거장의 묵직하고 진솔한 책은 1999년 씌어졌다. 마지막 장은 집필 당시 60년을 함께 산 아내의 80세 생일을 앞둔 어느 오후의 정경을 그린다. 좋아하는 작가들과 자신의 아들, 손녀 사진이 걸린 거실에 앉아 그는 아내에게 책의 마지막 구절에 쓸 인용문이 생각났다고 말한다. 호프만슈탈의 말이다. "꿈이야, 현실일 리가 없어. 우리 둘이 함께 있다니."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는 2013년 9월, 두 해 전 세상을 뜬 아내 곁에, 아도르노와 쇼펜하우어가 묻힌 그곳에, 함께 묻혔다.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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