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관습에 얽매였던 중세 서구 르네상스 바람 '근대의 몸' 출현예술가들, 그림 속 인물에 비탄·감동 등 감정 부여초상화 늘고 자유로운 화풍 유행
몸의 역사를 살피는 것이, 몸에 켜켜이 쌓인 시간의 더께를 들추는 것에 한정되지는 않는다. 무엇보다 물질문명의 핵심, 즉 인간이 세대를 거듭하며 기술을 투자하고 자연요소를 대면하면서 쌓아온 방식들을 복원하는 첫걸음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옷과 같은 물질 외에 음식, 기후, 기호는 물론 선과 악을 받아들이게 하는 갖가지 인상, 몸짓, 감정의 결과물들이 인간의 몸에 서려 있기 때문이다.
역사 이래 몸을 거쳐 간 파편들은 과학의 힘이 미약했던 중세 이전엔 오직 종교에 투영된 상을 통해서만 관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서구사회에 르네상스의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이른바 '근대의' 몸이 출현하고, 몸을 바라보는 시각과 도구가 함께 발달하면서 역사가와 식자층은 더 이상 행성의 움직임, 부적이나 값진 물건에서 나오는 신비스러운 힘에 흔들리는 몸이 아니라 '인과율'로 설명할 수 있는 단단한 대상으로 몸을 인지하게 된다.
조르주 비가렐로 파리 5대학 교수 등 프랑스 사학자, 언어학자, 철학자 8명이 공동 집필한 는 르네상스부터 20세기까지 서구 학계가 축적한 몸 관련 담론을 집약한 저작이다. 2005년 프랑스에서 처음 출판된 책은 국내 번역본으로 1권 가 최근 발간됐으며 2ㆍ3권은 연말까지 나올 예정이다.
1권의 집필을 이끈 비가렐로 교수는 위생 및 몸과 관련한 사회적 태도의 역사를 연구해온 학자로 개인의 몸과 근대 정치의 연관에 천착한 미셸 푸코에 영향을 주었다. 저자들은 책의 서문을 통해 "몸을 단순히 '자연'으로 보지 않고 '문화'로 보면, 진정한 과거의 부활(르네상스)에 이를지 모른다는 작업가설을 증명코자 책을 만들었다"며 '몸의 역사'에 대한 통찰의 이유를 밝힌다. 야만의 시대로 불렀던 르네상스 이전 서구사회는 종교와 관습으로 사슬처럼 몸을 묶었다. 르네상스가 시작되며 '근대의'몸이 출현했고 이 몸은 인간 자체의 추진력과 힘만으로 존재를 설명할 수 있는 기능을 갖게 됐다고 책은 설명한다.
여전히 종교와 관습이 몸의 해방을 늦추는 힘으로 작용했지만 '몸의 개별화'의 싹은 15세기에 움텄다. 르네상스 시대 예술가들은 몸을 표현하는 방식을 다양화했으며 사실적으로 화폭에 담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15세기 마사초가 그린 '지상의 낙원에서 쫓겨나는 아담과 이브' 속 두 인물은 중세의 사슬을 끊고 비탄에 젖은, 감정에 충실한 '몸'으로 표현됐다.
18세기로 나아가면서 자아의 등장으로 인한 개인(몸)의 해방을 확인할 수 있는 증거들은 더욱 쌓여간다. 실례로 공증인이 작성한 유산목록을 살펴보면 근대에 접어들며 개인 초상화가 많이 늘어났지만 종교화는 줄었다. 더구나 화가가 개인적이고 내밀한 표시를 과거보다 더 많이 담아 초상화는 훨씬 덜 엄숙해졌다.
하지만 저자들은 종교가 여전히 일상의 많은 가치를 지배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상징들도 소개한다. 중세인은 성인(聖人)들의 유물을 적극 수집하고 그들의 몸을 나눠 가지는 데도 집착했다. 16세기 초 한 수집가는 유럽 전역에서 성(聖)유물을 사들였는데 예수의 배내옷 조각, 성 요셉의 바지, 예수가 머물렀던 구유의 지푸라기 몇 가닥, 성모의 머리카락과 젖 몇 방울, 그리고 예수의 수난을 상징하는 채찍과 못 조각도 그 일부다. 이 독특한 수집가는 무려 1만7,413점의 성유물을 모았다고 책은 전한다.
제3장 '앙시앵레짐 시대 유럽의 몸과 성욕'에 이르러선 15세기부터 18세기까지 몸에 깃들었던 성적 관행을 분석한다. 당시 중산층 이상 사회는 점차 부르주아의 색채가 짙어지고 궁중문화의 영향을 받아 '강한 성적 수치심'을 인지하고 예절의 영역인 몸에서 성욕의 영역을 분리해내기 시작한다. 하지만 개인화가 가져온 성적인 관용의 확대는 '자연을 거스르는' 죄를 짓지 말라는 종교의 교화와 꾸준히 투쟁한다. 부의 축적으로 '개인 침대'의 사용이 자연스러워진 부유층과 달리 서민들은 여전히 뒤섞여 잠자기에 익숙했기 때문에 결혼에 앞서 오랜 세월 성생활을 경험하는 문화가 뿌리 깊었다고 책은 설명한다. 합법적인 형태로 성을 배우는 과정으로 인식됐던 여성 동성애, 여성의 남장 트렌드, 여성을 남성과 구별되는 그 나름의 성으로 인정하는 사회 풍토 등에 대한 묘사도 치밀하게 책은 이어간다.
18세기에 들어서며 과학의 눈부신 발달에 힘입어 몸의 운동을 보는 고전적 시각들도 변화했다고 책은 4장과 6장에 걸쳐 전한다. 몸은 그 어느 때보다 자주 더 측량과 조사의 대상이 됐으며 집단과 공동체의 중요성이 더해지면서 위생이 중요해지고 나아가 해부학에 대한 오랜 통념인 '잔인한 관습'도 점차 사회에서 지워져 갔다고 설명한다.
책은 오랜 세월 동안 의학, 과학, 사맨極?의해 먼저 베일이 벗겨진 인간의 몸을 장대한 역사의 시선으로 면밀히 관찰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보다 밀도 있게 과학이 발전한 19세기 이후 몸을 목격할 수 있는 2, 3권에 많은 기대가 간다.
양홍주기자 yangh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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