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손 든 것은 나였다. 선임자가 1년 연수를 떠나 비어버린 과학 기자 자리에. 부장은 반색했다. 편집국 유일의 이공계 출신 기자는 연수를 떠났고, 과학은 아무나 취재 못한다는 고정관념이 팽배했다. 자원자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안도하는 분위기였다.
장벽은 곧 닥쳤다. 품고 있었던 기사 아이디어는 한 달 만에 고갈됐다. 과학자 취재는 아무리 준비를 해도 힘들었다. 방대한 과학지식을 전달하는 그들의 말에서 뭐가 기초지식이고 뭐가 뉴스인지 그림이 안 그려졌다. 사실 취재 준비 자체가 쉽지 않았다. 자료실엔 지식이 없었고 보도자료엔 도통 흥미로운 내용이 없었다. 편집국에서 가장 먼저 인터넷과 이메일을 사용한 기자 중 하나였지만 속도는 느렸고 콘텐츠는 중구난방이었으며 파일은 못 열기 일쑤였다. 불과 16년 전 그랬다. 제대로 된 기사를 쓰기 위해, 그리고 솟구치는 나 자신의 호기심부터 채워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책이었다.
그 즈음 시내 대형서점의 전문서적 코너에서 찾아낸 것이 다. 한 물리학과 교수로부터 추천받은 2개의 책 중 하나였다. 이렇게 시작된 나의 과학책 읽기 향연은 같은 교과서류의 책을 넘나들다, 곧 도래한 과학교양서 붐의 시기 베스트셀러인 등으로 찬란한 종을 울렸고, 와 같은 고전으로 풍성해졌다. 전에도 책을 즐겼지만 갈수록 책을 숭배했다. 책 한 권을 읽고 나면 앞으로 읽고 싶은 책 목록이, 앞서 읽은 책의 의미가, 달라져 있다. 내가 달라져 있다. 이렇게 인류의 지식을 흡수한 개인 중 어느 누군가가 또 새로운 지식의 조약돌을 하나 올려놓겠지. 그러니 어찌 책을 숭배하지 않을 수 있을까.
'신의 입자'가 중력을 매개하는 힉스 입자를 가리키는 것은 이제 대중에게도 어느 정도 알려져 있다. 중력을 매개하는데 입자가 있어야 하느냐는 의문은 책을 통해 스스로 풀어보길 바란다. 하여튼 이 별명이 꽤 유명해진 것은 최근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의 개가다. 우주만물을 근본 입자와 힘으로 설명하는 물리학 표준모형에서 단 하나, 마지막까지 실험적으로 확인되지 않아 물리학자들의 애를 태웠던 힉스는 2012년 드디어 CERN에서 정체가 드러났다. 2013년 최종 검증에 이어 노벨 물리학상까지 내쳐 거머쥐었으니 힉스는 이제 인간의 입자다.
이 책 는 근본 입자(원자) 아이디어를 발명한 그리스 철학자 데모크리토스에서부터 초대형 입자가속기를 지어 실증에 나선 현대 물리학자에 이르기까지 면면한 인류의 탐험을 다룬다. 그렇다. 원둘레 27㎞나 되는 엄청난 시설을 지어놓고 세계 각국 수천명이 CERN에 모여서 하는 일이 지난 2,500년 동안 인류가 해온 '우주의 근원 찾기'인 것이다.
요즘은 이보다 내용과 번역이 훌륭한 과학교양서들이 많다. 하지만 다 읽고 난 뒤 노벨상 수상자인 저자의 '동료'로 인정받을 수 있는 책은 없다. 저자 레온 레더만은 "여름이 겨울보다 따뜻한 이유를 제대로 설명한 하버드대 졸업생이 23명 중 2명뿐이었다"며 많은 이들이 인생에서 상실한 것에 대해 아쉬워한다. 이 책을 읽을 정도의 과학적 관심과 호기심만 있어도 레더만이 동료라고 부르는 이유다.
나는 물리학을 편애했다. 학창시절부터 내가 물리학을 좋아했다는 사실과 그 이유가 근원에 대한 호기심과 열망이었음을 를 읽고 인식했다. E=mc²처럼 단순한 수식으로 우주의 진리가 표현된다는 것에 소스라치는 전율을 경험한 것이 나뿐만 아니라는 사실도 다른 책을 읽고 알았다. 은연 중 물리학자와 동료의식을 환영했고, 몇 년 뒤 미국 일리노이수학과학학교(IMSA)에서 레더만을 만나고 CERN을 취재한 경험을 더할 나위 없는 행복으로 기억한다.
불친절한 서평이 되겠지만 이제야 밝히자면 이 책은 시중에서 구할 수 없다. 2006년 출판사에 확인해보니 90년대 과학교양서의 운명이 대체로 그러했듯이 초판 인쇄 후 절판됐다. 나는 를 책장에 꽂아두고 있는 전국 1,000명 중 한 명이 됐다. 다시 출판돼 어느 독자에겐가 책의 향연을 여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김희원 사회부 부장대우 h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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