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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상호의 f2.8]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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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상호의 f2.8] 진실

입력
2014.03.05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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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

통도사에서 내원사로 가다 길을 잘못 짚어 산을 한 바퀴 돌았다. 도는 길에 저 돌덩이를 만났다. 어느 고등학교의 담벼락 안이었다. 그러니 저 돌덩이는 교훈이거나 그것에 버금가는 지표를 새겨 놓은 것일 테다. 삶이 결코 아름다운 봄소풍 같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이미 깨쳤을 학생들에게 저 돌은, 그래도 짐짓 의연한 척해야 한다는 당위나 위계(僞計)의 필요를 역설하는 대신, 이 세상이 생겨먹은 꼴을 여섯 글자의 명제로 직설해 버리고 있었다. 말하자면 그건, 진실.

발화하고 만 진실은 매양 앙상하다. 아무한테나, 아무 때나, 아무 데서나, 아무렇게나 말하여져서는 안 되는 까닭이 거기 있을 것이다. 저 진실은 그런데, 관변단체들의 무지막지, 혹은 무지몽매를 구호로 새겨놓은 것과 똑같이 생긴 돌덩이에 갇혀 추적추적 비를 맞으며 서 있으면서도, 감격스러울 만큼 의연했다. 마치 스스로 효수되어 자신의 진실됨을 증거하고 있는 듯했다. 골고다 언덕 위 십자가 형틀의 풍경이 이와 같았을까.

짐작하건대 긍정에 있을 것이다. 저 눅진한 진실을, 발가벗겨서 청소년들 앞에 매달아 놓았을 사람의 의중은. 세상은 본디 쓰니 부서지지 말라고, 어떻게든 삼키고 견뎌내라고. 아마 그게 교육일 텐데 그런 인식의 평면성은 내겐 매력이 없는 것이고, 느닷없이 마주친 진실이 다만 나는 반가웠다. 바라건대 저 진실을 보고 자랄 학생들 중에 철저한 허무주의자, 지독한 퇴폐주의자, 예수와 같은 혁명가도 포함돼 있기를. 그리하여 부디 이 갑갑한 평면성의 세상에 숨 쉴 수 있는 균열을 내 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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