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들의 형사 재판부 기피 현상이 갈수록 두드러지고 있다. 사회적 관심이 높은 대형 사건이 많은데다 경력에는 큰 이점이 없는 등 여러 요인이 복합된 결과다.
지난달 중순 서울고등법원 인사에서 재배치된 68명의 부장판사 중 형사부를 지원한 법관은 1명뿐이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서울고법에는 민사부 45개, 형사부 12개, 행정부 11개가 있다. 서울중앙지법에서도 형사 재판부를 1지망한 판사는 10명 중 2명 꼴에 불과했다는 후문이다. 법원은 인사 지망에 대한 정확한 수치는 공개하지 않고 있다.
올해 서울고법 형사부는 특히 기피가 심했다. 1심에서 무죄가 선고돼 논란이 컸던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의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 1심에서 징역형이 선고된 이재현 CJ회장 사건 등 굵직한 항소심 재판이 줄줄이 대기하고 있는 탓이다. 김 전 청장과 이 회장 사건은 자동배당시스템을 통해 각각 형사2부, 형사10부가 맡게 됐다. 내란음모 혐의로 징역 12년을 받은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 사건도 곧 배당되며, 국가정보원 대선개입 혐의로 기소된 원세훈 전 국정원장 사건도 현재 1심 마무리 단계로 올해 안에 서울고법으로 가게 된다.
한 부장판사는 "정치적으로 이슈가 된 재판은 어떤 결과가 나오든 판사가 비판을 받고 작은 실수조차 확대 해석되기 마련"이라며 "올해 고법 형사부에 대형 사건이 많아 배당을 놓고 '폭탄 돌리기'같다는 말까지 나온다고 한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재벌 사건도 항소심이 형량을 결정하는 사실상 마지막 단계여서 부담이 크다.
대형 사건이 아니더라도 법관들은 형사 사건을 꺼린다. 재경지법의 한 평판사는 "폭력을 일삼는 남편을 살해한 부인에 대해 민사 재판에선 법이 정한 기준에 따라 손해배상액만 산정하면 되지만, 징역형을 내릴지 집행유예로 풀어 줄지는 인간에 대한 깊은 고민 없이 결론이 나지 않는다"며 피고인의 운명을 결정해야 하는 형사 재판의 어려움을 설명했다. 형사 법관 출신의 변호사는 "형사 변론은 법관 출신이 모두 소화할 수 있는 영역으로 인식되기 때문에 특화된 민사 재판과 비교해 경력상 이점도 없다"고 업계의 분위기를 전했다.
때문에 법원은 인사 때마다 민사부에 지원한 판사들을 설득해 형사부로 배치하느라 골치를 앓는다. 법원장 출신의 한 고위법관은 "매년 형사 재판부 라인업을 구성할 때 머리가 아팠던 기억이 생생하다"며 "성실하고 능력 있는 법관이 형사부를 1지망하면 드러내 말은 못해도 매우 고맙게 느껴졌다"고 말했다. 대법원 관계자는 "형사 재판 기피 현상이 어제 오늘 일은 아니지만, 형사 재판을 했다고 (인사에서) 가산점을 줄 수도 없다"며 "법관들이 사명감을 갖고 형사 재판을 맡아주길 기대하는 것 말고 뾰족한 방법이 없다"고 밝혔다.
정재호기자 next88@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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