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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3월 5일] 모르쇠 외교

입력
2014.03.04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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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보면 꽤 오래 기자 생활을 해왔지만 잘 했다고 기억에 남는 일이 별로 없다. 기사로 사회의 반향을 일으킨 것은 고사하고 몇 안 되는 사람 눈물 닦아준 일도 거의 없는 것 같다. 그런 대의명분과는 별개로 '특종'이라도 해서 다른 기자들과의 경쟁에서 이기는 개인적인 성취감을 맛 본 적도 그다지 없었다.

반대로 기억에 남는 건 다른 기자들에게 기사를 뺏기는 '낙종'이나, 함께 취재를 하고도 그게 무슨 의미인지 헤아리지 못해 눈뜨고 기사를 놓친 경험이다. 몇 해 전 아주 짧게 외교부를 들락날락하며 외교 정책을 취재할 때도 그런 일이 있었다.

아랍 민주화의 봄 이후 리비아 상황이 매우 불안정할 때였다. 카다피 정권을 무너뜨리려는 반군의 공격이 4개월째 이어지고 있었다. 어느 날 외교부 고위 당국자가 기자실에서 현지 상황을 설명했다. 리비아는 지금 어떤 국면인지, 반군과 카다피 정권의 싸움은 누구의 승리로 끝날지, 한국인 안전에 문제는 없는지 같은 질문이 쏟아졌다.

당국자는 이미 미국과 서유럽 심지어 일본도 비판하고 나선 독재자 카다피 정권이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카다피 정권이 바뀌더라도 기존 정부와 관계를 단절하는 것이 우리에게 이익이라고 볼 수 없다는 생각을 내비쳤다. 분쟁과 상관없이 전문 관료들은 계속 이어질 것이고, 한국 기업들이 그들과 30년 이상 이어온 관계는 물론 전후 복구사업까지 생각하면 단절이 이로울 게 없다는 식의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공습으로 반군을 지원하는 영국이나 프랑스에도 거부감이 있었지만 이미 세계가 독재자로 알고 있는 카다피 정권을 대놓고 비판하지 않는 모습도 갸우뚱했다. 한국 기업에 이익이라니, 그게 국익이라니 뭐 그런가 보다 했다.

다음 날 한 신문이 1면 머리기사로 이 당국자의 설명을 비판했다. 그 신문은 다음 날 사설로 또 문제를 삼았다. 요약하면, 경제적 손익만 따지는 근시안적 외교는 국가의 품격을 떨어뜨려 오히려 국익을 해친다는 지적이었다. 다른 기자들은 어땠는지 모르지만 나는 그 기사를 보고 속으로 '물먹었네' 했다. 얼마 뒤 자원해서 외교부를 떠났다. 문제 의식과 기사 감각, 취재력에서 탁월한 그런 기자들에게 깨끗하게 '패배'를 인정한 것이었다.

최근 소치 동계올림픽 기사를 쓰면서 그때 일이 생각났다. 소치 올림픽은 러시아 푸틴 정부의 동성애자 차별 등 인권문제를 이유로 각국 정상들이 개막식에 대거 불참한 이례적인 올림픽이었다. 주요 8개국 중에는 일본과 이탈리아를 제외한 정상이 아무도 개막식에 가지 않았다. 리비아의 경우와는 또 달라서 러시아의 인권 차별을 문제 삼는 것은 러시아를 건드려 외교관계에 손해를 보면 봤지 무슨 이득이 있을까 싶지만 서구 지도자들은 그 쪽을 선택했다.

개막식에 시진핑 중국 주석과 아베 일본 총리는 고민 없이 달려갔다. 국익을 매우 중시하는 국내 일부 신문이 그런 외교의 장에 우리 대통령은 왜 안 갔느냐고 따지고 들자 일정이 맞지 않았다고 청와대가 해명한 걸 보면 박근혜 대통령도 가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 건 아닌 듯하다. 그런데 푸틴 대통령은 지금 우크라이나에서 어떤 일을 벌이고 있는가.

외교에서 국익을 우선해야 하는 것은 틀리지 않지만 그를 위해 자기 잇속 챙기기나 떼쓰기, 눈치보기나 모르쇠를 되풀이 해서는 안 된다. 적어도 주요 20개국에 이름을 올리는 나라라면 명분을 앞세워 국익을 창출해야 한다.

영국 외교관이자 작가인 해롤드 니콜슨은 외교 입문서로 널리 읽히는 그의 저서 에서 이런 말을 했다. '나 자신의 실질적인 경험과 외교를 통해서 나는 여러 해 동안 연구를 통해 '도덕적 외교'가 궁극적으로 가장 효과적이며 '부도덕한 외교'는 목적을 그르친다는 확신에 이르게 되었다.' 할 말은 좀 하고 살자.

김범수 국제부장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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