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중년 배우와 달랐다. 배우들을 대면할 때 흔히 접하는 '생활 주름'이 그다지 띄지 않았다. 생글거리는 얼굴이 발산하는 긍정의 힘이 청춘 배우 못지 않았다. 지나친 집착도, 안일한 포기도 않을 듯한 모습에서 중년의 여유가 느껴졌다. 4일 만난 김희애는 지상에 발을 단단히 붙인 채 몽상을 즐기는 듯한 인상이었다. 그는 21년 만의 스크린 복귀작인 '우아한 거짓말'(감독 이한)의 개봉(13일)을 앞두고 있다.
'우아한 거짓말'은 밝기만 하던 막내 딸이 세상을 떠난 뒤 그 죽음의 비밀을 알게 된 엄마와 언니의 사연을 차분한 어조로 전한다. 소설 등으로 유명한 김려령 작가의 동명 소설이 밑그림이다. 김희애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으면서도 매사 당당한 싱글맘 현숙을 연기한다.
강산이 두 번 변하도록 스크린을 멀리한 이유가 궁금했다. 답변은 좀 싱거웠다. "아이들을 연년생으로 낳으면서 TV 드라마도 많이 못했다"며 주부의 어쩔 수 없는 사정을 이유로 댔다. 그는 "다 인연이 있는 것인데 ('우아한 거짓말'로) 영화 활동을 할 운명이었다"고도 말했다. '우아한 거짓말'과의 인연은 그가 두 아들의 엄마이기에 가능했다. 김희애는 "이야기가 남의 일 같지 않았고 원작이 끝까지 읽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고 말했다. "영화 '완득이'를 재미있게 봐 (이 영화를 연출한) 이한 감독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고도 했다.
그는 요즘 드라마 '밀회'를 촬영 중이다. 청춘의 아이콘 유아인과 호흡을 맞추고 있다. 젊은 천재 피아니스트 선재(유아인)와 사랑에 빠지는 성공한 중년 커리어 우먼 혜선이 요즘 카메라 앞 역할이다. 서른을 넘고 결혼을 하면 이모나 고모로 조로해야 하는 다른 여배우에 비할 때 그의 연기 행보는 극히 이례적이다. 그는 쉰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멜로를 소화할 수 있어 "무척 좋다"고 했다. "후배들을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운동하고 (배우) 수명을 길게 해 우리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의욕을 드러냈다.
예능프로그램 '꽃보다 누나'에 출연한 이유도 비슷했다. 김희애는 "평소 활발하게 활동하시는 선배 분들이 ('꽃보다 누나'의 1부격인 예능프로그램) '꽃보다 할배'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니 부럽기도 하고 존경스럽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미숙, 장미희, 차화연 선배님이 연기 활동하면 저도 좋아요. 윤여정 선생님이 건강이 안 좋아져 멋을 못 부리면 너무 슬플 듯해요. 청바지는 어린 애들만 입나요? 저희는 입으면 안 되나요? ('꽃보다 누나'로) 어른 세대의 존재감을 보여줘서 좋았어요."
화면 밖 삶을 물으니 "보통 주부"라고 바로 답했다. "밖에서 화장하고 사진 찍는 (화려한) 시간은 5분에 불과하다"며 "집에 돌아오면 후딱 옷 갈아입고 설거지한다"고 말했다. "며느리로서 제사상도 차리고 밖에서 제 일도 하는 게 제 삶을 균형 있게 만든다"고 덧붙였다.
1983년 '스무해 첫째 날'로 데뷔한 지 31년. 김희애는 "누구 말마따나 최근 제8의 전성기를 맞았다"면서도 "언제 훅 갈지 모르지 않겠냐"고 반문했다. "화장품 광고 촬영 일정이 잡히면 거울을 보며 신경 쓰는" 나이라 "'어쩌면 이게 내 마지막 촬영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을 매번 한다"고 했다. "그러다 결과물을 보면 멀쩡하게 나와 스스로 놀라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하면서 두렵기도 하다"고 그는 말했다. 김희애는 화장품 모델로 11년째 활동 중이다.
21년 만에 스크린에 돌아왔으나 다음 영화는 훨씬 더 빨리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아직 계약은 안 했으나 5월 '밀회'가 종방하면 영화를 하나 더 찍을 듯하다"고 말했다.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