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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이야기/3월 5일] 뿌리의 힘

입력
2014.03.04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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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갈이를 했다. 집에 있는 식물들을 다 죽이고 딱 하나 남은 산세베리아다. 몇 년 전 어느 봄날 두꺼운 잎사귀 두 개만 달랑 솟아 있는 것을 사왔는데, 튼튼하다는 명성에 걸맞게 이 녀석만은 기특하게도 새 잎이 쑥쑥 돋으며 잘 버텨주었다. 그러다 성장이 멈춘 것은 재작년부터였다. 화분이 작은 탓인 것 같아 분갈이를 해 줘야지 해 줘야지 마음만 먹고 있다 이제 겨우 실행에 옮긴 것이다. 신문지 위에 엎어놓고 보니 흙 반 뿌리 반이었다. 답답했겠구나 싶었다. 큰 화분으로 갈아준 후에는 그동안 산세베리아를 품고 있던 작고 하얀 화분을 씻었는데, 세상에, 답답하다 못해 터지기 직전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묵한 안쪽에 길고 짧은 실금이 가득했다. 화분을 박차고 깊게 넓게 뻗어나가고 싶은 뿌리의 힘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는 무늬였다. 햇살 아래로 가져가니 바깥쪽에서도 안쪽의 실금이 말갛게 비쳐보였다. 병아리가 막 태어나기 전의 알이 이러할까. 언젠가 미술관에서 보았던 커다란 달항아리도 떠올랐다. 마루에 윤을 내는 기름을 넣어두었던 까닭에 원래 하얀 색이었던 항아리에는 노르스름한 빛깔이 반 넘게 배어 있었다. 기름을 기억하고 있는 달항아리. 뿌리의 힘을 기억하고 있는 화분. 그릇은 삶 자체를, 시간 자체를 담기도 하나 보다. 빈 화분에는 선인장이나 다시 심어볼 생각이었는데 아무래도 그냥 두어야 할 것 같다. 뿌리가 남긴 기운이 이미 담겨 있으니까.

신해욱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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