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 배우 윌 스미스가 무대에 올랐다. 그가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열기 무섭게 수상작을 발표했다. 순간 객석이 환호로 뒤덮였다. 흑인 감독이 사상 처음 미국 아카데미영화상의 최고상을 거머쥐는 순간이었다.
영국 출신의 흑인감독 스티브 매퀸의 '노예 12년'이 2일 오후(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 돌비극장에서 열린 제86회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했다. 아카데미 86년의 역사 동안 흑인 감독이 최우수감독상이나 작품상을 손에 쥔 경우는 단 한차례도 없다. '노예 12년'의 작품상 수상은 할리우드에서 그 동안 비주류로 여겨졌던 흑인 영화가 인종차별의 벽을 뛰어넘어 주류의 한 갈래가 됐음을 의미한다.
'노예 12년'은 미국 남북전쟁 직전 뉴욕에서 자유롭게 살다가 납치돼 12년 동안 루이지애나에서 노예로 산 흑인 솔로몬 노섭의 실화를 스크린으로 옮긴 작품이다. 노섭의 고통스러운 12년 생활은 1853년 동명의 자서전으로 만들어져 베스트셀러가 됐다. 매퀸 감독은 자유인으로 살다 갑작스레 노예로 살게 된 한 흑인의 허구를 영화로 구상했다가 노섭의 자서전을 접하고 영화화 했다. 노예제도의 참상과, 고난 속에서도 피어나는 인간애를 그려낸 '노예 12년'에 대한 평단의 반응은 뜨거웠다. 올해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드라마 부문 작품상을 수상했고 미국제작자조합과 영국 아카데미영화상에서도 작품상을 각각 받았다.
'노예 12년'이 여러 상을 받았음에도 오스카까지 품에 안을지에 대해선 회의적인 시각이 적지 않았다. 아카데미영화상을 주최하는 미국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협회(AMPAS)의 보수성이 그 배경으로 주로 꼽혔다. 백인 남성이 헤게모니를 쥔 AMPAS는 흑인 감독이나 여성 영화 감독들에게 인색한 경향을 보여왔다.
아카데미는 2010년 캐슬린 비글로의 '허트 로커'에 작품상과 감독상을 안겨주며 여성에 대한 빗장을 비로소 풀었다. 같은 해 리 대니얼스 감독의 '프레셔스'가 흑인 감독 영화 최초로 작품상 후보에 올라 화제를 낳았다. '똑바로 살아라'(1989)의 스파이크 리 감독 등이 종종 아카데미상 작품상 후보로 거론됐지만 단 한 차례도 오스카 레드카펫을 밟지 못해 인종차별 논란이 일었다. 아카데미는 반면 흑인 배우들에게는 일찌감치 문을 열어줬다. 1940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해티 맥대니얼이 여우조연상을 받은 이후 흑인 남우주연상만 넷(시드니 포이티어, 덴젤 워싱턴, 제이미 폭스, 포레스트 휘태커)을 배출했다.
미국 감독조합상의 감독상 수상 불발도 '노예 12년' 제작진의 얼굴을 어둡게 했다. 미국 언론은 감독조합상 감독상을 오스카 작품상의 향배를 가늠하는 최고의 지표로 여긴다. 올해 이 상은 '노예 12년'의 최대 경쟁자였던 '그래비티'(감독 알폰소 쿠아론)가 차지했다. 영화평론가 오동진씨는 '노예 12년'의 오스카 수상에 대해 "인종의 벽을 넘어선 수상 결과로 이 영화가 작품상을 타지 못할 것이라 생각한 게 오히려 편견이었다"고 평가했다.
이날 무대에 오른 매퀸 감독은 격정을 누를 수 없는 듯 떨리는 목소리로 수상 소감을 밝혔다. 그는 미리 준비해온 메모를 읽으며 "노예제도를 견딘 사람들, 그리고 지금도 노예제도로 고통 받는 2,100만명에게 이 영화를 바친다"고 말했다.
'노예 12년'은 흑인 여배우 루피타 뇽에겐 최우수여우조연상을 안겼고 최우수각색상(존 리들리)도 수상했다.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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