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를 앞두고 아내는 오른손 엄지를 깁스로 두른 채 집으로 돌아왔다. 고백하건대 그때 나는 그 하얗고 딱딱한 깁스를 바라보며 가부장제 그늘 아래 태평한 세월을 즐겨온 남자들이 할 법한, 시커멓고 물렁한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10년 넘게 맞벌이 아내가 차려주는 밥을 먹는데 익숙했던 나는 아내의 깁스를 부끄럽게도 나의 재앙으로 받아들였다. 우선 아내는 최소 한 달 이상 손에 물을 묻히는 노동, 예를 들어 설거지를 전혀 할 수 없으며, 손빨래와 물청소 등 직장 여성이라는 신분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수행해온(고맙게도) 가사노동을 더는 못하게 되었다. 더구나 손이 많이 가는 초등학교 3학년 아들 녀석의 육아는 아내의 손에 얹어진, 5㎝ 길이의 요망한 깁스 덕분에 조금이나마 내 몫으로 돌아왔다. 주말이면 한 시간가량, 마치 신성한 의무라도 되는 듯 아들과 캐치볼을 경건히 치러내곤 '좋은 아빠'라 자찬하며 아내에게 남편의 10대 권리들을 읊어댔던 나는 엉겁결에 캐치볼이 아니라 메이저리그 경기에 비견할만한 육아의 본무대에 오를 처지가 돼버린 것이다.
깁스의 존재를 알아채고 아내에게 무슨 일이냐 묻기까지 수초에 불과한 시간 동안 캐치볼로 갈고 닦은 실력 따위로 프로야구 개막전에 오른 얼치기 선수처럼 나는 얼어붙었고, 워밍업도 없이 결혼 10여 년 만에 처음으로 가사노동 무대로 등 떠밀려 등판을 해버렸다. 하지만 몇 번의 설거지와 몇 접시의 냉동식품 요리가 식탁에 오른 후 며칠 지나지 않아 아내의 '반깁스'에 의해 강판을 당했고 아내는 다시 부엌으로 돌아와야 했다.
짧게나마 겪은 가사와 육아의 본 무대는 가부장제를 아내의 갑작스러운 깁스만큼이나 증오한다고 자신했던 내게 "이것이 과연 우리 혹은 아내들이 홀로 감당해야 하는 노동"인지를 되묻게 했다. 아내의 깁스는 누구도 값을 치러주지 않는 가사와 육아 등 이른바 재생산노동의 가치에 대해 "어째서 아무도 목청을 높이지 않냐"는 사뭇 비장한 질문도 품게 만들었다. 나아가 '육아 부담을 견뎌낼 수 없을 것'이란 가늠으로 둘째 아이 낳기를 거의 포기하고 살아온 우리 부부의 자발적 산아제한이 단순한 이기심에서 비롯하지 않았다는 생각에까지 미쳤다.
40여 년 동안 가사노동의 임금 지급 캠페인을 벌여온 세계적인 여성학자 실비아 페데리치는 저서 에서 "노동자들이 다음 날 아침 생산활동을 별 탈 없이 이어갈 수 있도록 유지해주는 육아와 가사노동에 대해, 그 혜택을 받는 자본가와 국가는 임금을 부담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깁스'와 같은 갑작스러운 사고에도 끄떡없이 가정을 굴리고 아이를 키워내 사회에 이바지하는 아내 혹은 남편들에게 적절한 보상을 하자는 얘기다. 신자유주의가 착취한 재생산노동의 가치 되찾기에 소극적이라면 '재생산 수단'이 붕괴할 것이란 경고도 빼놓지 않았다. 페데리치의 이러한 지적은 저마다의 '깁스'를 두른 채 묵묵히 가사노동과 사회노동을 함께 감당하는 이 땅의 수많은 아내를 향한 응원의 메시지이며 동감의 표현이다.
하지만 재생산노동을 바라보는 정부와 기업들의 시선은 여전히 일방적이며 차갑다. 가사노동 대부분을 차지하는 육아를 몇몇 수당들과 실현하기 힘든 육아휴직만으로 "버텨달라" 부탁하고, "이 정도면 충분치 않느냐"며 "잔말 말고 '둘째'를 낳아라" 부추기는 프로파간다들이 곳곳에 즐비하다. 얼마 전 박근혜 대통령은 한 행사장에서 다산왕이라 불리는 한 여성 희극인을 옆자리에 앉혔다. TV로 이를 지켜본 아내와 나는 함께 깁스를 바라보며 갖지 못한 우리의 둘째를 떠올렸다. "이 여성을 보며 더 많은 아이를 낳아라"고 거칠게 외치는 정부의 메시지를 우리 부부는 물론 많은 외동아이 부모들은 똑똑히 알아들었을 것이다.
상처가 나으면 깁스를 풀 듯, 첫째를 낳으면 둘째를 품는 세상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지 못한 세상을 살아가는 나와 아내는 외로움을 타기 시작한 외동아들을 지켜보며 나이만 먹어갈 뿐이다.
양홍주ㆍ문화부 차장대우 yangh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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