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준비를 하고 있다. 창고를 정리하는 일이 하염없다. 가져갈 것과 버릴 것을 구분하는 것만도 큰일인데, 지나간 시간이 자꾸 뒷덜미를 잡는다. 손글씨로 된 일기와 편지와 엽서들. 밑줄이 가득한 낡은 책들. FM라디오를 직접 녹음해 워크맨으로 듣던 음악 테이프와 도시락 크기만 한 비디오테이프들. 바닥에 아예 주저앉아 마냥 들춰보고 만지작거린다. 싸갈까 말까 망설이는 것만으로 금세 하루가 지난다. 이사를 여러 번 다니며 버릴 건 꽤 버렸는데도 이 모양이다. 나름 소중한 것만을 남겼기 때문일 텐데, 소중한 것도 쌓이고 쌓이면 무덤덤해지다 거추장스러운 짐으로 변하는지라 웬만한 정은 떼버리고 '특히' 소중한 것만을 고르려니 마음이 오락가락할 수밖에. 어쨌건 어렵사리 이쪽저쪽으로 갈라놓고 보니, 한쪽엔 달콤하고 다정하고 아련한 기억들이 모여 있다. 다른 쪽엔 씁쓸하고 부끄럽고 불편한 기억들이 모여 있다. 짐을 싸면서도 알게 모르게 환하고 기분 좋은 것만 남도록 기억을 편집하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몇 번 더 이사를 다니며 잡동사니를 추리고 추리면, 집에는 종내 어떤 나의 모습이 남게 될까. 달갑지 않은 기억을 하나씩 잘라낼 때마다 창고에 보관된 내 삶은 그만큼씩 얄팍해져 있겠지. 사오십 년씩 한 주인이 뿌리를 깊이 내리고 있는 집이 불현듯 경이로워진다. 다락에 창고에 지하실에, 편집되지 않은 과거가 빼곡히 쌓여 있을 그런 집이.
신해욱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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