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라도 피아노를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요?" 자신의 나이를 4학년 7반이라 수줍게 밝혀온 중년의 여인을 만났습니다. 어렸을 적 엄마 손에 억지로 이끌려 피아노 학원을 꾸역꾸역 다녔다 합니다. 바이엘과 체르니 같은 교본은 재미보다는 지루함을 안겨 주었고, 달걀을 쥔 듯 건반 위에 손을 올려놓으라 윽박지르던 선생은 학원비를 가져오는 날에만 유난스레 친절했다더군요. 중학교에 진학한 후에야 엄마는 더 이상 그녀를 음악학원으로 떠밀지 않았습니다. 벨벳 덮개로 온몸을 감싼 피아노는 침묵의 자물쇠를 채운 채 마루의 모퉁이를 육중이 차지할 뿐이었지요. 세월이 한참 흘러 그녀가 결혼하게 되었을 때, 피아노는 자개장롱과 견줄만한 중요한 혼수품이었습니다. 하지만, 악기라기보단 구색을 갖춘 가구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아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쳐주고 싶었지만, 아이는 컴퓨터 게임이나 태권도를 더 좋아했습니다. 그렇게 노래를 잃은 악기는 침묵의 재갈을 물린 채용케 세월을 견뎌 왔습니다.
도리어 제가 그녀에게 묻습니다. "짐짝 같던 피아노를 왜 지금껏 처분하지 않았죠?" 언젠가는 꼭 연주해보고 싶은 곡이 있어서란 대답을 듣습니다. 드뷔시의 아라베스크. 그녀의 레슨을 흔쾌히 받아들였던 것은 어쩌면 그녀의 꿈보단 악기의 침묵을 해제하고 싶다는 의욕이 앞선 까닭이었는지 모릅니다. 헌데 피아노를 만난 조율사가 난감한 표정을 짓습니다. 무너져 내린 악기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선 줄의 음정을 맞추는 정음뿐 아니라 악기의 뼈대를 물리적으로 바로잡는 '조정'까지 필요하다는 것이었어요. 수리비용은 낡은 피아노의 몸값을 훌쩍 뛰어넘고도 남습니다. 악기를 살리려는 그녀의 마음은 의외로 굳건했습니다. 덩달아 그녀의 아라베스크를 듣고 싶다는 저의 바람 역시 절실해졌습니다.
미국 에모리대학의 신경학과 연구팀은 59세부터 80세에 이르는 황혼기 노인 70명을 대상으로 흥미진진한 설문을 진행했습니다. 이들을 세 그룹으로 분류했는데 악기를 한 번도 배운 적이 없는 A, 9년 이하의 실습경험을 가진 B, 10년 이상 꾸준히 연주해온 C로 나누어 신경심리학 검사와 일반 생활에 대한 입체적인 설문을 진행한 것이지요. 고령의 나이인데도 악기를 오래 연주한 그룹은 그렇지 않은 그룹보다 사고력과 시각-공간 지각력, 언어 기억력과 운동기민성 등에서 훨씬 높은 성과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서울대 보라매병원의 정신건강의학과에서는 악기연주와 치매 예방의 상관관계에 대해 흥미로운 추정을 들려줍니다. 2개 이상의 외국어를 배우면 치매가 4~5년 늦어진다는 연구결과가 있는데, 악기를 연주하며 음을 감별할 때 활성화되는 뇌의 부위와 외국어 발음을 새롭게 익히고 구별하는 뇌의 부분이 서로 같아 악기를 배우면 배울수록 치매를 예방할 수 있다는 긍정적 추정이 가능하다는 것이지요. 한편 미국 UCLA 연구진 역시 실험대상을 피아노 학습의 유무로 나누어 음악교육이 학습효과에 끼치는 순기능을 설명했습니다. 피아노를 배운 그룹은 그렇지 않은 그룹보다 시공간 추론능력에서 34%나 높은 성과를 보였다고 합니다. 오른손과 왼손을 어느 한쪽 치우침 없이 동등하게 사용하는 피아노 연주는 양쪽 뇌의 균형 있는 발달을 돕는다는 것이지요.
만학(晩學)에도 분명한 장점이 있습니다. 스스로의 자발적 선택으로 연습을 시작했으니 어린 학생들보다 학습 동기가 분명합니다. 음악을 비판적으로 듣고 해석하는 것이 가능해 곡에 대한 이해도 역시 높습니다. 무언가를 받아들이는 데 있어 맹목적이지 않으며, 지적인 장치를 활용해 분석적인 인지 과정을 일으킬 줄 압니다. 단, 몸(직관)보다 머리(이성)를 앞세운 분석력은 속도와 효율을 떨어뜨리기는 양날의 검이 되기도 하겠고요. 한국 피아노계의 전설적인 대모로 일컬어지는 고(故) 김원복 선생님께서는 생전에 90세 기념 연주회를 열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나이 70만 되었어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 볼 것이다. 중요한 것은 조급하거나 게으르지 않은 꾸준한 실천이다."
조은아 피아니스트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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