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희경 다섯번째 소설집 6개의 단편 연작 묶어내전학생, 결혼후 이주여성 등 서로 다른 이야기지만 연결고리로 느슨하게 이어져신도시서 적응하며 느끼는 고립감과 고독 그려내
소설가 은희경(55)과 인터뷰는 예정보다 조금 늦어졌다. 앞서 있었던 행사를 다른 지역으로 착각한 탓에 약속 장소를 잘못 잡은 탓이었다. "길치인 데다 고유명사를 잘 기억하지 못해서"라며 멋쩍게 웃었다. "처음 서울에 왔을 땐 더했죠. 버스를 반대방향으로 타는 일도 많았어요."
아니나 다를까, 단편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의 주인공 안나는 작가를 닮았다. 은희경이 최근 펴낸 다섯 번째 소설집이자 열두 권째 작품집의 표제작을 읽다 보면 1970년대 10대 시절을 보냈을 작가를 자연스레 상상하게 된다. 그는 "구체적인 인물이 있어야 상상하기 쉽다"며 반쯤 수긍했다.
"예전엔 지방 학생들이 입시를 앞두고 서울로 올라와 학원을 다니는 일이 많았어요. 겨울은 그런 지방 학생들을 결코 반겨주지 않는 계절이잖아요. 낯선 곳에 적응한다는 건 지금까지 살아왔던 방식과 부딪히는 일인데 그걸 쓰고 싶었어요. 그때 느꼈던 고립감과 고독을."
눈이 잘 내리지 않는 남쪽의 작은 도시에서 전학생 루시아와 함께 자란 안나는 대학 입시를 앞두고 서울로 올라온다. 서울 출신인 루시아와 달리 안나에겐 서울이 유난히 춥다. 홀로 남겨진 하숙방은 욕실을 개조해 만든 탓인지 더 춥고 황량하게 느껴진다. 학원에서 알게 된 루시아의 남자친구 요한을 짝사랑하며 꽁꽁 언 슬픔을 남몰래 품고 지냈던 그 시절, 중년이 된 안나는 32년 전 서울에서 처음 맞이했던 크리스마스와 루시아, 요한 그리고 오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눈송이를 추억한다.
2009년 계간지를 통해 처음 발표한 '눈송이'는 당시 작가가 그리고 있던 큰 그림 중의 일부였다. 단편으로 끝내고 싶진 않지만 장편으로 만들고 싶진 않은 작품. 그 해 작가는 아버지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해 신도시로 이주한 여성의 이야기 '프랑스어 초급과정'을 썼다. 결혼 후 쭉 신도시에서 살고 있는 작가와 닮았지만, 전혀 다른 인물의 이야기다. 그는 "첫 번째 단편을 쓰고 나서 그때 생각한 인물들에 대해 더 쓰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 두 번째 단편을 썼는데 그 때부터 연작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장편으로 쓰면 주변 인물들이 늘어나고 그들이 얽히는 걸 노골적으로 드러내야 해서 개인의 이야기에 맞는 단편 연작 시리즈를 선택하게 됐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여러 계간지를 통해 발표한 적 있는 여섯 편의 단편은 서로 다른 이야기이지만 크게 보면 하나의 이야기로 보인다. 단편들을 느슨하게 하나로 묶는 연결고리도 있다. '프랑스어 초급과정'의 주인공이 과거 안나의 하숙집 옆집에 살았고, 주인공과 그 아이는 '스페인 도둑'에 나오는 어머니와 아들로 연결된다. 안나는 'T아일랜드의 여름 잔디밭'에 등장하는 소년의 어머니와 겹친다. 지난 가을에 발표한 마지막 단편 '금성녀'의 끝부분엔 뫼비우스의 띠처럼 안나로 추정되는 여학생이 등장한다.
"장편이라면 캐릭터가 더 분명하고 더 상투적이었을 것 같아요. 인물들이 각자 개별적이면서도 큰 흐름은 유지하고 싶었어요. 우리의 삶이 흘러가면서 많은 게 변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살아가죠. '무엇이 나를 이 자리에 데려 왔을까' 생각해 보면 큰 사건보다 오히려 스쳐가는 인연이 지금의 나를 여기에 있게 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신도시는 이번 열두 권째 작품집 의 단편들을 잇는 중요한 공간이다. 작품 속 인물들이 도착하게 되는 낯선 장소를 대변하는 곳이다. 작가는 "지금 우리에게 언제나 변함 없는 공간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며 "노마드 같은 현대인이 어디에 발을 붙여야 할까. 그 곳이 신도시 같은 장소이고 스치는 인연 속에서 쓸쓸함의 연대 같은 게 있지 않나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은희경은 형식적인 실험을 쉬지 않는 도전적인 작가다. (2010)는 래퍼가 랩을 하는 듯한 문장을 시도했고, (2012)은 복합적 구성의 자유로운 형식을 구사했다. 장편 같은 단편, 단편 같은 장편을 시도한 도 그에겐 새로운 시도다. 그는 다작이 가능한 이유가 "무엇이든 싫증을 잘 내기 때문"이라며 "소설을 쓰면서 늘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걸 쓰면 잘 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금세 다른 작품을 쓰게 된다"고 했다.
고경석기자 kav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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